책 소개
몸과 감각을 되찾아, 정신이 자연성을 부리고 쓰기까지
《정신의 개벽》 서문은 몸돌아봄·마음돌아봄·본격돌아봄을 거쳐 생각위주의 삶에서 감각위주의 삶으로 바뀌고, 그 과정에서 앞의 아홉 권과 이 열 번째 권의 글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밝힙니다. 감각으로 보고 생각으로 표현하고 다시 보고 또 표현하는 이 저술의 진행을 ‘이중나선구조’라고 직접 부릅니다.
감각으로 안을 파고들어 직접 보고, 생각으로 본 것을 밖에 표현합니다. 다시 보고 다시 표현하는 동안 보는 자리와 깊이가 달라지면서 같은 대상도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책에서도 앞에서 세운 말이 뒤에서 더 큰 자리 안에 다시 놓이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납니다.
첫 글은 「어째서 몸이 주인인가?」입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한 육체 하나로 끝나지 않고 감각·대아·생명까지 넓혀 쓰입니다. 마음은 생각·소아·목숨과 연결됩니다. 생각이 주인 노릇하던 전도된 관계를 뒤집어 감각이 생각을 거느리고 다스리고 부리고 쓰는 데서 출발합니다.
좌뇌와 우뇌도 처음부터 이 주종관계 안에 들어옵니다. 좌뇌는 생각·소아, 우뇌는 감각·대아와 연결되며 둘 다 몸의 기능입니다. 문제는 생각이 감각을 누르고 독점적으로 주인 행세하던 데 있고, 먼저 감각이 살아나 그 관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생각을 없애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마음을 칼에 비유하여 필요할 때 꺼내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 칼집에 넣듯, 감각이 중심을 잡은 자리에서 생각을 도구로 써야 합니다.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오히려 정확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공부에 몸의 실제 감각이 붙습니다. 아픔을 무조건 피할 적으로만 보지 않고 몸이 주인을 부르는 신호로 보며, 호흡·맥박·냉온·압박·진동을 실제로 느낍니다. 몸을 알아차리고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 감각계발의 한가운데에 놓입니다.
감각계발은 밖을 잘 보고 듣는 능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보면서 듣고, 밖의 소리를 들으면서 호흡과 심장박동도 함께 느끼며, 안과 밖을 동시에 놓치지 않는 데까지 넓어집니다. 자기 몸 안과 바깥 세계가 동시에 밝아지는 내외명철을 생활의 능력으로 세웁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수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됩니다. 생각에게 눌리지 않는 텅 빈 자리를 본 뒤에도, 생활 속에서 안과 밖을 함께 보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부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자기 얼굴과 눈빛이 어둡고 굳는 순간까지 알아차려 다시 밝고 부드럽게 돌립니다.
마음의 분열을 어느 정도 다스린 뒤에는 하단전이 중요한 중심이 됩니다. 육체를 실제로 운행하려면 정신이 아랫배 하단전에 뿌리내려 호흡·맥박·기의 흐름을 감각하고 몸을 다스리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단전 하나만 붙잡지 않습니다. 두뇌가 비워져 상단전에 하늘이 열리고, 가슴 중단전에 사랑의 정감과 태양이 뜨며, 하단전에서는 몸과 마음을 실제로 움직이는 중심이 섭니다. 두뇌·가슴·아랫배가 한 몸 안에서 서로 통합니다.
중반의 큰 주제는 광명의 하늘입니다. 몸을 떠난 신비체험을 좇기보다 몸을 여의지 않은 채 하단전에 중심을 잡고, 텅 빈 두뇌와 심장박동·호흡을 함께 감각하면서 자기 안의 하늘과 태양, 정신의 광명을 직접 보려고 합니다.
광명의 하늘도 이해와 증득을 나눕니다. 말과 글로 수긍하는 해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보고 놓치지 않으며, 아픔과 괴로움과 경계가 와도 그 중심과 빛이 생활에서 힘을 써야 증득이 됩니다.
「하나이면서 둘인 이중나선구조」에서는 생각과 감각을 하나라고만 해도 맞지 않고 둘이라고만 해도 맞지 않습니다. 감각은 안으로 향하고 생각은 밖으로 향하지만, 실제 운행에서는 두 방향이 서로 이어지고 꼬여 한 구조를 이룹니다. 앞에서 본 것을 다시 보고 표현하는 동안 같은 관계도 다른 자리에서 새롭게 드러납니다.
좌뇌와 우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좌뇌본위 생각위주의 이분법을 넘은 뒤에는 좌뇌의 생각과 우뇌의 감각이 각자 맡은 기능을 살리면서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감각의 승리는 한쪽의 영구한 독재가 아니라 두 기능을 제대로 쓰기 위한 주도권 회복입니다.
밖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힘을 원심력, 안으로 받아들이고 모으는 감각의 힘을 구심력이라고 합니다. 먼저 구심력이 원심력에 밀리지 않고 원점과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무심에 앞서 일심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연히 텅 빈 상태가 된 것만으로는 중심이 없어 다시 흩어질 수 있습니다. 본격돌아봄의 구심력이 생각의 원심력을 이겨 하나의 축인 일심이 서고, 그 일심이 지속되어 무심의 하늘이 열려야 그 중심에서 생각을 잡아 돌릴 수 있습니다.
「봄나라 수행의 순서」에서는 책읽기에서 몸돌아봄·마음돌아봄·본격돌아봄으로, 다시 원점과 하단전의 중심을 세우고 하늘·태양·광명을 본 뒤 바라봄과 늘봄으로 생각을 내고 거두는 주인이 되는 순서를 밝힙니다.
중심을 얻었다고 원심력을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밖으로 너무 흩어질 때는 안으로 당기고, 안으로만 위축될 때는 밖으로 펼칩니다. 구심력과 원심력을 모두 거머쥐고 때와 상황에 맞게 두 힘을 부리고 쓰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그 힘은 수행 시간에만 쓰이지 않습니다. 돈과 건강, 운동, 일과 공부, 천직, 말하고 듣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표정, 걷고 먹고 일하고 잠드는 하루의 동작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정신력은 특별한 상태보다 생활을 정확하게 운행하는 힘으로 시험됩니다.
초반의 ‘몸이 주인’이라는 말도 뒤에서는 더 넓게 읽힙니다. 몸과 마음은 자연성의 영역이고, 사람은 그 자연성에 끌려다니는 데서 벗어나 음기운과 양기운을 필요에 따라 거느리고 부리고 쓰는 정신의 자주력을 세워야 합니다.
「정신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정신을 음기운과 양기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둘을 균등하게 거느리고 부리고 쓰는 제로 에너지이자 영성, 우주의 주인으로 풉니다. 생로병사하는 몸과 변하는 마음을 부리는 중심을 정신으로 세웁니다.
표제 글 「정신의 개벽」은 텅 빈 무심을 아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감각의 음기운이 생각의 양기운에 밀리지 않고 원점까지 들어가 균형을 잡으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생각과 몸과 마음을 조절하고 운전할 정신력이 생깁니다. 자연성에 끌려가던 사람이 정신의 자주력으로 자연성을 부리고 쓰는 것이 정신의 개벽입니다.
바로 다음 「우주의 단전이 정신입니다」에서는 앞서 중요하게 세웠던 하단전의 자리도 다시 달라집니다. 몸의 하단전에 정신을 정착시키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우주의 단전인 정신 자체를 깨달은 뒤에는 하단전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고 필요할 때 이용하면 됩니다. 몸의 한 지점에 잡았던 중심이 본태양·제로 에너지·우주의 정신 자체로 넓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의식의 혁명과 평상심으로 돌아옵니다. 몸의 컨디션과 마음의 기분, 희로애락은 계속 변해도 정신은 그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중심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필요하면 내고 필요 없으면 거둘 수 있는 평상심을 생활에서 확인합니다.
마지막 글 「정신은 본래 여여합니다」에서는 그 평상심마저 애써 만들어 붙들어야 하는 상태로 두지 않습니다. 자연과 몸과 마음은 계속 변하지만 정신은 본래 변하지 않았고, 깨닫고 보면 공부했다는 흔적과 깨달음 전후마저 사라집니다.
《정신의 개벽》은 몸과 감각을 되찾아 생각의 주도권을 바로잡는 데서 시작해 하단전·내외명철·사랑·광명, 이중나선, 원심력과 구심력, 일심과 무심을 통과합니다. 마지막에는 정신 자체를 본태양이며 우주의 단전으로 밝히고, 그 정신이 몸과 마음과 자연성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