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건강, 호흡과 심장의 파동, 무심과 공심, 숨죽여봄과 정중동을 길게 거친 뒤 모든 공부가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는 한 목표로 모입니다. 싸움을 참는 법이 아니라 감각의 구심력이 욱하는 생각의 원심력보다 먼저 중심을 잡고, 생각을 없애지 않은 채 필요할 때 다시 살려 써 자기와 남의 싸움을 끝내는 힘을 기릅니다.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앞 권 《가만히 있어봄》에서 기른 멈출 힘을 실제 몸과 마음, 사람 사이의 관계, 분노와 언쟁에서 어떻게 쓰는지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인간관계와 싸움만 다루지는 않습니다. 제2차 트레킹, 내면의 바람소리와 물소리, 운기조식, 수승화강, 폐와 심장, 단전호흡, 심신의 온냉과 파동이 전반부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싸우지 않는 힘을 도덕 규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실제 안정에서 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초반에는 ‘내면의 소리’를 듣습니다. 숨죽임 뒤 저절로 일어나는 호흡, 심장박동, 몸 안에서 오르내리는 기운을 바람과 물결, 파동과 파장으로 듣고 느끼면서 관음의 범위를 몸 안까지 넓힙니다.
수승화강도 호흡기술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단전·폐·심장의 작용을 감각하고 머리의 열과 몸의 냉기를 조절하여 심신의 균형을 되찾는 수행·건강 이론으로 풉니다.
원문에는 산소결핍·저체온·통증·암의 예방과 치유, 회춘과 장수까지 연결하는 강한 효능 주장도 나옵니다. 이것은 원아 유종열님의 수행 이론과 체험에 관한 원문 주장으로 보존해야 하며,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법이나 안전한 호흡 지침과 같은 것으로 바꾸어 읽을 수 없습니다.
긴 전반부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한 기술보다 자기를 실제로 느끼는 힘입니다. 낭독도 횟수만 채우지 않고 문장을 읽는 순서대로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확인하고, 호흡과 심장의 움직임도 설명으로만 알지 않고 실제 감각으로 확인합니다.
몸돌아봄은 목·팔·허리·다리 같은 바깥 동작에서 심장·호흡·온냉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파고듭니다. 밖의 동작을 보던 감각이 몸 안의 박동과 파동까지 느끼면서 자기 몸을 더 세밀하게 압니다.
인간개발과 자아완성도 생각이 감각을 억누르는 독재에서 감각이 생각을 살려 쓰는 협치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두뇌의 전환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가슴과 하단전까지 자리잡아 실제 몸과 관계를 바꾸어야 합니다.
소통도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자연이나 사람에게서 실제로 느낀 장점과 감동을 말로 표현하고, 윗사람일수록 먼저 낮은 사람에게 다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언로를 열어야 합니다.
침묵만 미덕으로 삼지 않습니다. 생각과 말이 싸움을 만들 때는 멈추지만, 감사와 이해를 표현하고 서로 힘을 주기 위한 말은 적극적으로 써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 삶은 말을 없애는 삶이 아니라 말의 용도를 바꾸는 삶입니다.
싸움의 또 다른 뿌리는 자기 이미지입니다. 자기를 착한 사람·훌륭한 사람·옳은 사람으로 고정하면 반대 평가를 받는 순간 충격과 방어가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아닌 무심으로 돌아가야 칭찬과 비난, 평판의 선악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행동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고정된 자기상과 실제 행동을 구별하여, 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는 일을 끝냅니다.
중반에는 쉬지 않고 몸을 살리는 심장의 은혜를 직접 느끼는 공부가 커집니다. 번뇌망상이 치솟을 때 두뇌의 생각에서 심장박동으로 감각을 돌리면 생각의 행렬이 끊어지고 자기 몸이 저절로 살아 움직이는 힘이 보입니다.
몸 안에서 먼저 은혜를 느끼고 감사와 보은을 체험해야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감사도 머리의 구호를 넘어 실제가 됩니다. ‘철이 든다’는 말도 명암과 온냉, 계절과 몸의 때를 알고 자기를 살리는 몸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넓혀집니다.
무위이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닙니다. 에고가 호흡·생각·말·행동을 직접 끌고 가지 않아도 다시 숨이 쉬어지고 생각이 나고 몸이 움직이는 자동의 삶입니다.
고요와 활동도 둘이 아닙니다. 숨죽임의 정에서 다시 들숨의 동이 일어나고, 생각이 그쳤다가 필요한 생각이 다시 나오며, 가만히 있다가 몸이 저절로 움직입니다. 정 가운데 동이 있고 동 가운데 정이 있습니다.
생사일여도 매 호흡의 정과 동으로 풉니다. 호흡이 그친 정을 죽음, 다시 호흡이 일어나는 동을 삶에 견주어 한 호흡 안에 생과 사의 한 주기를 놓습니다. 이 수행적 비유를 실제 육체적 사망과 같은 것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숨죽여봄은 그래서 끝이면서 시작이 됩니다. 생각·말·행동을 그쳐 본성·천성·정신의 고요로 돌아가는 끝이고, 그 고요에서 다시 호흡·생각·말·행동이 살아나 현상계로 나오는 시작입니다.
이 왕복에서 정과 동은 서로 끊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고요 속에서 움직임이 다시 나오고 움직임 속에도 고요한 바탕이 남아 있는 것이 자동 운행입니다.
그리고 분노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분노는 밖으로 터져나가려는 원심력이고, 그 힘이 말과 행동으로 폭발하기 전에 돌아봄의 구심력이 작동해야 합니다.
‘화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화를 누르는 것은 다시 생각과 생각의 싸움입니다. 욱하고 올라오는 힘 자체를 감각으로 비추어, 그것이 언행으로 쏟아지기 전에 안에서 알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구심력이 아직 약하면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실제 경계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돌아봄의 힘을 반복해서 길러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 힘은 선언이나 성격이 아니라 기량입니다.
숨죽여봄에서도 억지로 숨을 죽여 답답해지는 상태와, 이미 저절로 일어나고 있는 고요를 발견하여 안락해지는 상태는 다릅니다. 새 고요를 억지로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있는 무위의 정지를 직접 발견합니다.
보는 마음과 보이는 몸 사이의 거리도 줄어야 합니다. 숨죽여봄에서 주객일체가 되고 심신의 분열이 합일될수록 자기 안에서 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서로 판단하고 싸우는 구조도 약해집니다.
남과의 싸움보다 먼저 자기 안에 싸움이 있습니다. 옳다고 판단하는 나와 실제로 움직이는 몸, 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서로 갈라져 있으면 외부 갈등도 그 분열을 따라 커집니다.
견성·양성·솔성은 본성을 보고 끝내지 않습니다. 본성을 보는 견성, 고요와 안락의 힘을 충분히 기르는 양성, 그 힘으로 생각과 몸을 실제로 부리고 쓰는 솔성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후 생각은 다시 살아납니다. 인간개발과 자아완성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면 생각과 언어가 필요합니다. 감각이 생각을 이겼다고 생각을 죽여둔 채 둘 수 없습니다.
감각이 새로운 독재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감각이 중심을 잡아 생각이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한 뒤, 필요할 때 생각을 다시 살려 이해·설명·창조·소통에 씁니다.
숨죽여봄을 앞으로 더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지금도 호흡 사이에 정지가 있고 다시 호흡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발견하면 안락이 열립니다. 억지 유위에서 이미 이루어지는 무위로 보는 자리가 달라집니다.
수행의 초점도 새 상태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보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작용을 발견하는 데 놓입니다. 하려는 힘이 빠지고 숨·박동·움직임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볼수록 무위가 분명해집니다.
자기 존엄도 만인의 존엄으로 넓혀야 합니다. 자기가 본질적으로 존엄하다면 다른 사람도 같은 본질을 가진 존재이므로 차별과 멸시의 근거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와 사람 자체를 구별하는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해로운 행위는 해롭다고 볼 수 있지만, 상대를 고정된 악인이나 낮은 사람으로 만들어 미워할수록 싸움은 커집니다.
과거·미래의 생각에 끌려가기보다 지금 여기의 몸과 호흡에 뿌리내리고, 하단전에 중심을 두어 흔들리는 시선과 기운을 모으는 것까지 시간과 공간을 부리고 쓰는 일에 포함됩니다.
낭독도 반복 횟수보다 자기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과 말, 호흡과 몸동작을 동시에 감각하는 훈련이 됩니다. 눈과 귀, 생각과 감각이 함께 일해야 합니다.
정신·마음·몸을 주인과 도구로 구별한 뒤에도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감각의 주도 아래 다시 생각에게 소임을 주고, 서로 다른 두 기능을 협치시킵니다.
대도 역시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상생입니다. 생각과 감각, 보수와 진보처럼 다른 두 힘이 서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임을 하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돌아봄으로 밖으로 나가는 생각의 원심력을 안으로 돌리고, 감각이 생각의 주도권을 되찾으면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그 바라봄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늘봄입니다.
본연의 자기를 보려 할 때에도 보는 자기를 하나 더 세우지 않습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이 사라질수록 돌아봄과 바라봄이 함께 작동하고, 안과 밖·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밝히는 내외명철이 됩니다.
「인간계발 자아완성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설정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까?」에서는 생각으로 시비하고 말로 논쟁하고 몸으로 투쟁하는 폭력성을 끝내어 ‘싸우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을 구체 목표로 세웁니다.
그래서 인간완성은 높은 경지를 얻었다는 선언으로 판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싸움이 실제로 줄었는가, 말로 따지고 몸으로 맞서려는 반응이 경계에서 멈춰지는가를 생활에서 확인합니다.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이 되기까지」에서는 과거를 재판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반대 생각 사이에 끌려다니는 상태를 생각의 노예라고 하고, 생각이 일어나는 줄 알고 낼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생각의 주인으로 둡니다.
생각의 주인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각이 생각의 발동 여부를 알고 필요한 경우 생각을 내어 쓰고 필요 없으면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능력이 싸움을 미리 막는 직접적인 힘이 됩니다.
「고요할 정과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과의 연관성」에서는 싸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억지로 지키지 않습니다. 내면의 고요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해지면 그 고요를 깨뜨릴 미움과 싸움을 저절로 놓게 됩니다.
싸우지 않음은 금욕보다 가치의 이동입니다. 상대를 이기는 만족보다 내면의 고요가 더 중요해지면 가만히 있어봄이 힘들지 않고, 싸우지 않는 쪽이 오히려 자연스러워집니다.
욱하고 올라오는 불기운도 생각으로 억압하지 않습니다. 숨죽여봄·가만히 있어봄에서 기른 고요한 감각의 물기운으로 그 불기운을 품고, 밖으로 터지기 전에 머금습니다.
감각이 생각을 이긴다는 말도 불을 꺼 없애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이 불을 머금고 보관하듯 생각이 제멋대로 폭발하지 못하게 하면서,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발동권을 감각이 갖습니다.
「감각이 생각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써서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으로 거듭납시다」에서는 생각을 낼지 말지 결정하는 권한이 감각에 돌아오면 욱하는 성질이 단독으로 발동하지 못하여 싸움을 미리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싸우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도, 화의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진 사람도 아닙니다. 감각이 먼저 알고 생각과 화의 힘이 밖으로 폭발하지 않게 하면서 필요할 때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숨죽여봄의 적과 가만히 있어봄의 정은 같은 고요입니다. 그 고요 속에서 몸은 쉬고 마음은 안식하며, 움직이는 생활 가운데서도 그 정을 잃지 않는 열반적정의 삶을 봅니다.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로 끝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비어진 진공에서 광명과 창조의 작용인 묘유가 나오고, 안의 일원상이 열리면 눈앞의 세계도 하나의 대원경으로 보입니다.
「도덕의 궁극적인 목표는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에서는 선의 편에 서서 악의 편 사람을 미워하고 편가르며 싸우는 데서 도덕이 끝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와 남의 싸움이 실제로 끝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선악의 구별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행위는 악하다고 보되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 않고, 시비에 걸려 욱하고 폭발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대덕군자의 기준으로 세웁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끝나야 남과의 싸움도 끝납니다. 감각의 구심력이 생각의 원심력보다 먼저 중심을 잡으면 밖에서 들어온 시비가 곧바로 자기 안의 싸움과 외부의 투쟁으로 번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성품에서 본 광명과 암흑의 장단점」에서는 광명과 암흑 가운데 어느 한쪽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을 함께 보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묻습니다.
최종점은 밝음이 어둠을 없애는 승리도, 감각이 생각을 영원히 제거하는 승리도 아닙니다. 고요가 중심을 잡고 감각이 주도권을 가지되 생각·말·행동·명암·동정을 모두 필요에 따라 살려 쓰는 둥근 사람입니다.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은 갈등을 피하고 좋은 사람이 되자는 책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파동을 실제로 감각하고, 무심과 심신일여를 세우고, 숨죽여봄과 정중동으로 멈출 힘을 기르며, 분노가 언행으로 터지기 전에 돌아봄의 구심력을 씁니다. 마지막에는 생각을 자유자재로 살려 써 자기 안의 싸움도 남과의 싸움도 끝내는 사람을 구체 목표로 세웁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왜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처음부터 싸움 이야기만 하지 않는지 궁금할 때
이 책에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참거나 져주는 것인지 궁금할 때
왜 수승화강·심장·호흡 이야기가 책 앞부분에 길게 나오는지 궁금할 때
무심과 공심은 싸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을 때
남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때
이 책이 말하는 소통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숨죽여봄이 왜 끝이면서 시작이라고 하는지 알고 싶을 때
분노가 올라올 때 어떻게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하는지 궁금할 때
주객일체와 심신일여가 싸우지 않는 삶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할 때
견성·양성·솔성은 이 책에서 어떻게 다시 설명되는지 궁금할 때
왜 생각을 없앴다가 다시 살려 써야 한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숨죽여봄을 억지로 하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할 때
돌아봄·바라봄·늘봄의 세 단계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고 싶을 때
인간계발·자아완성의 구체적인 목표를 왜 싸우지 않는 사람으로 잡는지 궁금할 때
고요할 정과 싸우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할 때
감각이 생각을 이긴다는 것이 생각을 없애는 뜻인지 궁금할 때
도덕의 궁극적 목표를 왜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책 마지막에 왜 다시 광명과 암흑의 장단점을 함께 보는지 궁금할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어떤 책인가요?
몸과 마음의 파동, 호흡과 심장의 작용, 무심과 공심, 숨죽여봄과 정중동을 길게 다룬 뒤 모든 공부를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는 한 목표로 모읍니다. 분노를 생각으로 억누르는 대신 돌아봄의 구심력으로 욱하는 힘을 언행 전에 보고 멈추고, 감각이 생각의 발동권을 잡은 뒤 필요한 생각은 다시 살려 씁니다. 자기 안의 싸움과 남과의 싸움이 함께 끝나는 것이 자아완성의 실제 기준입니다.
싸우지 않는 힘을 도덕 규칙이나 참는 성격에서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2차 트레킹, 내면의 소리, 운기조식·수승화강, 폐·심장·하단전, 온냉과 파동을 실제로 감각하면서 먼저 몸과 마음의 중심을 세웁니다. 자기 안의 불안정과 분열을 다루는 힘이 있어야 경계에서도 싸움으로 번지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분노가 올라오는데 ‘화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눌러 참는 것도 생각과 생각의 싸움입니다. 욱하고 밖으로 터져나가려는 힘을 감각이 먼저 보고, 말과 행동으로 폭발하기 전에 돌아봄의 구심력으로 머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싸우지 않음은 패배가 아니라 반응의 발동권을 자기가 갖는 힘입니다.
머리로만 싸움을 이해하지 않고 몸의 실제 안정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단전·폐·심장과 호흡, 몸의 온냉과 박동을 감각하면서 생각이 치솟을 때 몸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봅니다. 특히 심장이 쉬지 않고 몸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생각에서 심장박동으로 감각을 돌리는 공부가 중요하게 나옵니다.
남과 싸우기 전에 자기 안에서 보는 나와 보이는 나, 판단하는 마음과 실제로 움직이는 몸이 서로 갈라져 싸울 수 있습니다. 보는 마음과 보이는 몸 사이의 거리감이 줄어 주객일체·심신일여가 되면 자기 안의 판단과 대립이 약해지고 외부 갈등도 곧바로 싸움으로 번지는 힘이 줄어듭니다.
억지로 숨을 죽이려 하면 답답함과 유위의 힘이 남습니다. 뒤에서는 지금도 호흡 사이에 정지가 있고 다시 호흡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하는 데서 안락이 열린다고 합니다. 새 상태를 만들기보다 이미 일어나는 정지·호흡·박동·움직임을 보는 것이 무위의 숨죽여봄입니다.
돌아봄으로 밖으로 나가는 생각의 원심력을 안으로 돌립니다. 감각이 생각의 주도권을 되찾으면 몸과 마음을 함께 바라보는 안목이 열리고, 그 바라봄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늘봄입니다. 마지막에는 돌아봄과 바라봄이 함께 작동하여 안과 밖·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밝히는 내외명철이 됩니다.
광명을 높이고 암흑을 비판하는 단계만으로 끝나면 다시 한쪽에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광명과 암흑 각각의 장단점을 함께 보고 균형을 잡습니다. 밝음이 어둠을 없애거나 감각이 생각을 영원히 제거하는 승리가 아니라, 고요와 감각이 중심을 잡은 채 생각·말·행동·명암·동정을 모두 부리고 쓰는 둥금으로 맺습니다.
183개 인쇄 목차 항목과 174편의 Canon 원문 가운데 아래 스무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몸·마음·호흡의 정돈에서 시작해 무심·공심과 소통, 숨죽여봄·정중동, 분노의 제어, 견성·양성·솔성, 생각의 주인, 돌아봄·바라봄·늘봄, 고요와 싸움의 관계, 감각과 생각의 상생, 도덕의 궁극적 목표와 마지막 명암의 균형까지 책의 실제 진행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제2차 트레킹코스의 여정(旅程)
제2차 트레킹의 전체 노정을 제시하며 몸의 운기조식에서 내면의 파동·관음과 대원경까지 이 책의 탐구 방향을 예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