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과 색깔이 없는 본질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에서 출발해, 그 본질을 자기 안에서 어떻게 보고 알고 몸과 마음으로 증험할 것인가를 끝까지 묻습니다. 형이상학과 과학, 본질과 현상, 생각과 감각을 갈라놓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낭독·걷기·돌아봄·숨죽여봄으로 다시 연결하며, 바라봄과 돌아봄이 동시에 열린 내외명철과 명암일색의 본태양을 늘봄하는 인간개벽으로 모읍니다.
원아 유종열님 · 봄나라
책 소개
본질을 생각으로만 말하지 않고, 자기 몸과 마음에서 보고 알고 증험하는 형이상학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상권)》은 종이책으로 발행된 책이 아니라 유튜브 동영상으로 제작된 온라인 책이며, Canon에는 229편의 원문이 이어져 있습니다. 앞선 열여덟 권에서 본질과 현상, 정신과 육체, 생각과 감각, 돌아봄과 바라봄, 심신일여와 영육쌍전으로 각각 풀어온 공부를 ‘형이상학’이라는 한 구조 안에서 다시 봅니다.
머리말은 정치·종교·경제·군사력을 하나로 만드는 것만으로 사람의 갈등이 끝날 수 없다고 봅니다. 서로 다른 육체의 바탕에 하나의 정신이 있음을 자기에게서 깨닫고, 그 정신을 기준으로 종교와 이념의 갈등을 넘어서는 길을 형이상학에서 찾습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사의 한 분야를 소개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싸우는가, 근심·불안·공포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자기 안에서 직접 묻고 답합니다.
초반에는 주관과 객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문제를 다시 묻습니다. 몸을 돌아볼 때 보는 마음과 보이는 몸 사이에 실제 거리가 없음을 알면 심신의 둘이 하나가 되고, 그 하나마저 낱과 테두리가 없는 정신의 제로가 드러납니다.
「일원상」도 둥근 도형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대소·유무·선악·시비처럼 둘로 갈라진 양극을 한 원 안에서 함께 보고 다시 하나로 운용하겠다는 서원과 지도 방편으로 씁니다.
첫 번째 실천 축은 돌아봄입니다. 눈이 깜박이고 목·허리·손발이 움직이고 자기가 말하는 순간 그 움직임과 소리를 즉시 보고 압니다. 생각으로 특별한 상태를 만들기보다 생활에서 자기의 일거일동을 직접 감각합니다.
몸돌아봄이 익으면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마음돌아봄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힘보다 안으로 돌아오는 힘이 강해지면 본격돌아봄을 합니다. 몸동작을 보는 데서 생각과 감정을 보고, 다시 자기 전체와 본질을 보는 데까지 돌아봄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돌아봄의 눈을 영안이라고 하지만 영안은 육안을 버리는 눈이 아닙니다. 육안으로 밖의 사람과 사물을 보면서 동시에 영안으로 자기 몸과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완성은 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안팎이 함께 밝아지는 내외명철입니다.
두 번째 실천 축은 걷기 돌아봄입니다. 처음에는 시선을 앞에 두고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느끼며 걷습니다. 목적지 생각에 빠져 몸을 놓치지 않고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을 압니다.
걷기 돌아봄도 밖을 보지 않는 수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각의 힘이 충분히 살아나면 풍경을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자기 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습니다. 밖을 보는 힘과 안을 보는 힘이 함께 열립니다.
세 번째 큰 축은 낭독입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자기 목소리를 자기 귀로 듣고 글의 뜻도 함께 압니다. 소리만 내는 반복 독서도 아니고 뜻만 머리로 이해하는 공부도 아닙니다.
낭독에서는 감각과 생각이 합작합니다. 자기 소리를 듣는 감각과 문장의 이치를 밝히는 생각이 함께 작동해야, 남의 글을 읽으면서도 자기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감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으로 놓지 않습니다. 생각이 주도하여 감각을 억압하면 상극이 되지만, 감각이 주도권을 되찾은 뒤에는 생각을 다시 살려 이치를 밝히고 설명하고 소통하는 데 씁니다.
이 전환을 ‘마음에서 정신으로’라고도 부릅니다. 마음·생각이 몸과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고 정신·감각이 중심을 잡으며, 생각과 몸은 그 중심에서 필요한 만큼 부리고 쓰는 기능이 됩니다.
그렇다고 마음과 생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이 주도권을 잡은 뒤 필요한 사고는 마음에 맡기고, 대아가 몸을 움직일 때 소아는 그 움직임을 보고 압니다. 대아와 소아도 역할을 나누어 합작합니다.
형이상학과 과학도 완전히 끊어놓지 않습니다. 무변허공·진공·청정·광명을 본질의 성품으로 놓고, 그 광명에서 입자·파장·파동의 현상이 나온다는 구조로 본질과 현상을 연결합니다.
이 설명은 현대 과학의 확정된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현상이 나온다는 원문의 형이상학을 당시의 과학 언어와 연결하려는 시도입니다.
낭독과 걷기 돌아봄은 양대 수행입니다. 걷기에서는 움직이는 몸을 감각하고 낭독에서는 자기 소리를 들으며 뜻을 압니다. 두 수행을 함께 써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상태를 심신일여로 바꿉니다.
수행의 목적은 특별한 능력이나 외부의 명성을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남의 무대를 구경하는 관객으로만 살지 않고 자기 몸과 마음을 스스로 보고 듣는 삶의 주인공으로 돌아옵니다.
‘하늘과의 도킹’도 밖의 하늘에 몸을 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호흡·생각·말·행동의 사용권을 정신에 맡기고, 소아는 무의식으로 빠지는 대신 그 작용을 매순간 보고 알아차립니다.
맡김은 방임과 다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호흡과 몸동작을 더 세밀하게 보고, 필요할 때 생각을 쓰고 필요 없을 때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형이상학을 모양과 색깔이 있는 현상을 다루는 형이하학과 구별하여, 모양과 색깔이 없는 본질·정신·공간·하늘의 근본을 사유와 직관으로 탐구하는 공부라고 직접 정의합니다.
그러나 그 정의도 곧바로 자기 몸으로 내려옵니다. 본질을 밖에서 찾지 않고 자기 얼굴·목·가슴·배·수족, 두뇌와 심폐, 몸 안팎을 묻고 답하면서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래서 형이상학 용어를 많이 알아도 몸에서 확인되지 않으면 아직 자기 것이 아닙니다. 본질을 안다는 말은 머리의 빛, 심장박동, 하단전의 중심, 생각·말·행동의 발동과 정지까지 실제로 이어져야 합니다.
「인간개벽의 시대를 선언합니다」 이후에는 목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한 뒤에는 인간 자신의 두뇌·성품·몸과 마음의 운행이 바뀌는 인간개벽이 필요하다고 선언합니다.
인간개벽은 지식을 바꾸는 일만이 아닙니다. 생각본위에서 감각본위로, 마음본위에서 정신본위로, 밖으로만 흩어지는 원심력에서 안으로 돌아오는 구심력으로 삶의 중심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머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상단전의 두뇌, 중단전의 가슴, 하단전의 배로 정신이 내려와 심폐와 호흡, 몸의 온도와 움직임까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운기조식·수승화강·화강수승도 이 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머리는 밝고 서늘하며 몸은 따뜻하게 순환되는 상태를 영육쌍전의 한 표지로 삼습니다.
원문에는 두통·통증·질병·치유·회춘·장수와 연결된 강한 건강 주장도 반복됩니다. 이것은 원아 유종열님의 수행 체계 안에서 나온 주장으로 읽어야 하며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 효과나 안전한 호흡법과 같은 것으로 바꾸어 소개할 수 없습니다.
낭독과 걷기 돌아봄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의 유연성과 목·허리를 움직여 몸의 굳음을 푸는 몸의 유연성을 더해 ‘봄나라 4대 수행법’을 세웁니다.
네 수행은 따로 떨어진 기술이 아닙니다. 자기 소리를 듣고, 걸으면서 몸을 느끼고, 상대의 자리에 서서 보고, 몸의 굳음을 풀면서 안팎의 고정관념을 함께 풀어냅니다.
「네 가지 고개를 넘어 사람을 완성하는 네 가지 경지」에서는 낭독으로 자기 소리를 듣는 힘, 돌아봄으로 생각을 이기는 힘, 호흡과 심폐의 순환, 대아가 행위하고 소아가 주시하는 천인합작을 사람의 완성에 필요한 네 고개로 함께 봅니다.
견성은 본질의 공간과 빛을 보는 일이고, 양성은 그 본성과 부동의 힘을 길러 중심을 잡는 일이며, 솔성은 그 힘으로 생각·말·몸을 실제로 자유롭게 부리고 쓰는 일입니다.
견성도 감각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각이 살아난 뒤 사유·사색의 힘을 함께 써 본질의 이치를 밝힙니다. 생각은 처음에는 감각을 억압하는 힘이었지만, 감각이 살아난 뒤에는 본 것을 풀어내고 소통하는 기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명암일색은 이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중심입니다. 본태양의 빛은 밝음만의 빛이 아니라 명과 암이 함께 있는 본질의 빛입니다.
그래서 광명은 좋고 암흑은 나쁘다는 식으로 한쪽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본질에서는 음양·명암·대소·유무가 둘로 갈라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현상에서는 서로 다른 두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됨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험됩니다. 선악과 시비를 구별할 수 있어도 상대를 고정된 악인으로 만들어 미워하고 배척하는 데까지 가지 않고, 원수와 은인의 양극을 자기 안에서 함께 볼 수 있는지가 큰 관문이 됩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실제 관계에서 ‘상생의 혁명’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기 안의 빛을 보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 관계에서 미움과 적대가 줄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주관·세계관·인생관은 서로 떨어진 세 공부가 아닙니다. 우주의 바탕과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 세계의 현상과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그 안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한 사람의 삶에서 함께 결정됩니다.
「형이상학에 대한 총체적 자기 점검사항」에서는 개념을 외웠는지보다 자기에게 실제로 무엇이 되었는지를 확인합니다. 돌아봄이 안으로 향하는가, 주객의 거리감이 줄었는가, 본질의 빛을 보는가, 심장과 호흡이 실제로 감각되는가를 하나씩 묻습니다.
형이상학이 인본주의로 이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지의 본질을 자기 내면에서 보고 사람의 정신이 몸과 마음의 주인임을 깨달으면, 외부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 심신을 책임지고 부리는 주인으로 삽니다.
그 주인됨은 자기 한 사람의 우월성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같은 정신과 본질이 모든 사람에게 있으므로 남녀노소와 지식·돈·권력·명성의 차이를 넘어 사람의 존엄과 평등이 함께 섭니다.
직접 확인을 중시한다고 생각과 언어를 버리지 않습니다. 형이상학 책을 읽으면서 이치를 알아먹고, 감각으로 포착한 것을 생각으로 밝혀 다시 자기 몸과 생활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숨죽여봄에서는 ‘숨을 죽인 가운데 호흡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정중동이 생활 전체의 원리로 압축됩니다. 정지한 바탕과 움직이는 현상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호흡에서 생각·말·행동까지 확인합니다.
숨죽여봄을 위험하게 오래 숨을 억제하는 기술로만 읽으면 뒤의 원문과 맞지 않습니다. 숨이 그친 정을 알아차린 뒤 날숨과 들숨이 저절로 이어지는 자동 호흡을 보고, 그 고요를 잃지 않은 채 생각·말·행동까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숨쉬어봄으로 시작하여 일없음으로 끝나는 인간완성의 길」에서 ‘일없음’도 무활동이 아닙니다. 소아가 모든 일을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고, 정신이 자동으로 호흡·생각·말·행동을 하며 소아는 그 작용을 보고 압니다.
형이상학의 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백이 아닙니다. 행위자의 힘은 빠지지만 자각은 더 밝아지고, 몸과 마음은 정중동으로 저절로 움직이면서도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습니다.
「인간개벽의 길인 형이상학 총정리」에서는 생각본위 좌뇌에서 감각본위 우뇌로 중심이 바뀌고, 정신이 가슴을 거쳐 하단전에 안착하여 자동으로 심신을 부리고 쓰며, 감각의 눈으로 그 일거일동을 아는 과정을 한 구조로 정리합니다.
본태양의 빛, 심장의 열, 하단전의 중심, 자동 호흡과 몸동작, 생각과 감정의 자각이 따로 떨어진 항목이 아닙니다. 이 모두가 한 사람의 몸과 정신에서 함께 작동할 때 영육쌍전과 인간개벽이 실제가 됩니다.
「제3의 눈, 감각의 눈 뜨기」에서 제3의 눈은 특별한 초능력 기관이 아니라 자기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안으로 보고 아는 감각의 눈입니다.
육안이 밖을 보는 원심력이라면 감각의 눈은 안으로 돌아오는 구심력입니다. 이 눈이 떠지면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기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고, 필요할 때 가고 멈추는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내외명철입니다. 안만 보거나 밖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동시에 영안으로 자기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두 방향이 함께 열려야 합니다.
인간개벽은 기존의 바라봄을 폐기하고 돌아봄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바라봄을 유지하면서 돌아봄이 동시에 켜져 있는 삶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걷고 말하는 동안 밖의 현상을 보면서 자기 안의 생각·감정·몸동작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 동시성이 생활에 자리잡으면 돌아봄은 필요할 때 켜는 기술이 아니라 늘봄이 됩니다. 본질의 공간과 명암일색의 본태양을 늘 보면서 그 눈을 잃지 않은 채 현상 속에서 삽니다.
견성은 심신을 감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감각을 통하여 테두리 없는 공간과 그 안의 본질의 빛을 직접 보고 정신의 정체를 깨닫는 데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 뒤에도 끝이 아닙니다. 견성한 눈이 다시 감기지 않도록 몸돌아봄과 마음돌아봄을 생활에서 지속하고, 실제 사람을 대할 때 미움과 분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로 힘을 확인합니다.
외로움·고독·원수·부모·상대의 말·정치적 좌우 같은 생활의 경계도 형이상학의 시험이 됩니다. 본질의 이치가 자기 것이 되었다면 실제 경계에서 마음과 관계가 달라져야 합니다.
상대가 다른 말을 했을 때 곧바로 틀렸다고 판정하기보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묻고 상대의 자리에서 생각해봅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일은 자기 안의 불쾌함과 싸움을 풀어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원수를 은인으로 본다는 말도 상대의 잘못을 좋다고 인정하라는 말로만 읽지 않습니다. 자기가 미움과 분노에 끌리는 약점을 실제로 드러내어 공부할 경계를 만들어 준 존재라는 점에서 원수를 다시 은인으로 돌려봅니다.
마지막에는 ‘욱하는 성질 하나’를 실제로 다스릴 수 있는가까지 내려옵니다. 본질·공간·빛·인간개벽을 아무리 말해도 경계에서 분노가 폭발해 싸움으로 번진다면 아직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부리는 힘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상권)》은 앞선 열여덟 권에서 각각 드러난 본질과 현상, 정신과 육체, 생각과 감각, 돌아봄과 바라봄을 ‘형이상학’이라는 한 구조 안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구조를 낭독·걷기·돌아봄·숨죽여봄과 실제 인간관계에서 자기 몸과 마음으로 확인합니다.
상권의 끝에서 남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본질과 현상을 동시에 보고, 감각과 생각을 함께 쓰고, 바라봄과 돌아봄을 동시에 열며, 명암일색의 본태양을 놓치지 않은 채 사람과 관계 속에서 생각·말·행동을 실제로 부리고 쓸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상권)》은 어떤 책인지 알고 싶을 때
제목에 전자책이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 ebook인지 궁금할 때
이 책에서 형이상학과 과학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을 왜 자기 안에서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마음에서 정신으로 바뀐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돌아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할 때
낭독과 걷기 돌아봄을 왜 양대 수행으로 두는지 궁금할 때
낭독은 내용을 이해하는 공부인지 소리를 듣는 공부인지 궁금할 때
생각과 감각을 왜 상극과 상생으로 설명하는지 궁금할 때
봄나라 4대 수행법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견성·양성·솔성은 이 책에서 어떻게 정리되는지 궁금할 때
인간개벽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는 것인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을 왜 인본주의와 연결하는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을 왜 상생의 혁명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숨죽여봄이 형이상학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할 때
‘일없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궁금할 때
제3의 눈·영안은 이 책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할 때
바라봄과 돌아봄이 동시에 하나가 된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최종적으로 무엇을 늘봄하며 살아야 하는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의 깨달음이 실제 인간관계와 분노에서 어떻게 검증되는지 궁금할 때
이 책의 호흡·치유·장수에 관한 강한 주장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궁금할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상권)》은 어떤 책인가요?
앞선 열여덟 권에서 각각 풀어온 본질과 현상, 정신과 육체, 생각과 감각, 돌아봄과 바라봄, 심신일여와 영육쌍전을 ‘형이상학’이라는 한 구조 안에 세운 책입니다. 본질을 말로 아는 데서 끝내지 않고 자기 안에서 직접 보고, 낭독·걷기·돌아봄·숨죽여봄으로 몸과 마음에 힘을 길러 실제 생활과 관계에서 쓸 수 있는가까지 확인합니다.
이 책의 형이상학은 과거 사상을 해설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 몸과 마음, 두뇌·심폐·하단전의 작용을 자문자답하며 사람의 본질을 직접 탐구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보다 자기 안에서 공간과 빛, 심신의 움직임을 보고 확인하는 것을 중요하게 둡니다.
눈이 깜박이고 목·허리·손발이 움직이고 자기가 말하는 순간 그 움직임과 소리를 즉시 보고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몸돌아봄으로 몸동작을 보고, 마음돌아봄으로 생각과 감정을 보며, 본격돌아봄으로 자기 전체와 본질을 봅니다. 뒤에서는 밖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놓치지 않는 생활이 됩니다.
상대가 다르게 말하거나 불쾌한 경계를 주었을 때 곧바로 틀렸다고 판정하고 미워하거나 욱하는 성질이 폭발하는지로 실제 힘을 확인합니다. 상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자문자답하며 이해해보고, 돌아봄으로 자기 분노의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릴 수 있어야 본질의 평등과 상생이 생활에서 작동합니다.
원문에는 숨죽여봄·운기조식·수승화강을 두뇌의 빛, 심장의 열, 통증·질병·회춘·장수와 연결하는 강한 주장이 여러 글에 있습니다. LTOL에서는 이를 원문에 기록된 수행 체계의 주장으로 보존하되,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 효과나 안전한 장시간 호흡 억제 방법으로 바꾸어 쓰지 않습니다.
229편 가운데 아래 스물두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연결, 마음에서 정신으로의 전환, 낭독·걷기 돌아봄, 인간개벽 선언, 형이상학의 직접 정의, 생각·감각의 상생, 네 수행, 우주관·세계관·인생관, 자기 점검, 견성·양성·솔성, 상생의 혁명, 숨죽여봄과 일없음, 제3의 눈, 총정리, 내외명철, 후반의 형이상학 재정의와 늘봄까지 상권의 실제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머리말) 봉황(鳳凰)이 지구를 장악(掌握)하고 있는 조각(彫刻)이 뜻하는 의미는?
머리말에서 종교·정치·군사력의 통합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바탕에 하나의 정신이 있음을 깨닫는 형이상학을 초종교적 통합의 길로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