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권에서 세운 형이상학을 하권에서는 끝까지 자기 몸·말·관계·감정에 대입해 검증합니다. 걸을 때 상하·전후·좌우가 한 공간으로 열리는가, 자기 목소리를 듣는가, 감각이 주도한 뒤 생각을 다시 부려 쓸 수 있는가, 원수를 아직 미워하는가, 말이 막힐 때 자기 분노부터 돌아볼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마지막에는 정신을 부동심으로 세우고, 남에게서 얻은 지식과 자기에게서 직접 깨달은 이치를 구별하며 2,756편 전체를 맺습니다.
원아 유종열님 · 봄나라
책 소개
형이상학의 이치를 몸·말·관계·감정에서 끝까지 검증하는 마지막 권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하권)》은 봄나라 책 제20권이자 BOM-000001에서 시작한 2,756편 전체의 마지막 권입니다. 상권에서 형이상학의 체계를 세웠다면 하권은 그 체계를 몸·말·관계·감정·호흡·생활에 계속 대입하여 실제 자기 것이 되었는지를 확인합니다.
첫 글은 정신·마음·몸의 삼위일체에서 시작합니다. 본질이 하나라고 해서 세 기능의 차이를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정신·마음·몸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 통합이 출발점입니다.
곧이어 상대성과 절대성을 주객의 분리와 주객일체로 연결합니다. 생각은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을 둘로 나누지만, 감각으로 직접 볼 때에는 보는 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감이 사라집니다.
「일원상」에서는 모가 없는 둥근 사람을 다시 전면에 세웁니다. 대립하는 양극 가운데 한쪽만 택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둘을 융합하고 만유를 자기 정신 안에 품는 사람을 일원상의 인간상으로 둡니다.
「주객일체란」에서는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보는 실제 감각에서 주객일체를 확인합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풍경이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한 공간 안에 함께 있을 때 주객일체입니다.
하권 초반의 큰 시험은 ‘정신의 공간이 실제로 열렸는가’입니다. 위를 느끼면 아래를 잊고, 앞을 느끼면 뒤가 캄캄하고, 왼쪽을 느끼면 오른쪽을 놓친다면 아직 감각이 방향별로 갈라져 있습니다.
걷기 돌아봄은 그래서 단순한 산책이 아닙니다. 양팔과 양다리의 상하·전후·좌우 움직임을 한꺼번에 감각하여 여러 방향으로 나뉘어 있던 공간감이 하나의 열린 공간으로 통하는지를 몸으로 시험합니다.
‘절대공간’이라고 해서 물리적 방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하·전후·좌우 어느 한쪽에 붙잡혀 반대쪽을 잊지 않고, 방향은 그대로 있으면서 전체를 동시에 감각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공간의 통합입니다.
상권에서 낭독과 걷기 돌아봄을 양대 수행으로 세웠다면, 하권에서는 걸으면서 몸 전체를 놓치지 않는가, 말하면서 자기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가를 실제 성취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기 소리를 듣는 낭독은 발성 훈련이 아닙니다. 남의 말과 바깥 소리는 들으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놓치기 쉬우므로, 자기 음성을 들으면서 말할 수 있어야 자기 말과 그 말을 낳는 마음의 움직임도 함께 알 수 있습니다.
관음·천이통·신이통 같은 용어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가장 기초에는 자기 목소리를 실제로 듣고 아는 감각이 있고, 다른 사람의 인품을 음성만으로 안다는 더 강한 주장도 원문 안에 함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원문의 수행 세계로 보존해야 합니다.
하권은 생각을 다시 적극적으로 살립니다. 감각이 주도하는 무심의 두뇌가 된 뒤에는 생각을 억압하지 않고, 감각한 것을 놓고 자문자답하고 사유·사색하며 이치를 밝힙니다.
생각을 없애는 것이 완성이 아닙니다. 생각의 독재를 끝낸 뒤 감각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생각을 사유·설명·표현·소통의 도구로 부려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주도하면 감각과 상극이 되지만, 감각이 주도권을 잡으면 생각을 배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각이 생각의 발동과 정지를 맡고, 다시 살린 생각을 사유·설명·표현·소통에 써서 둘이 협치하고 연정합니다.
그래서 두뇌개벽은 좌뇌를 버리고 우뇌만 쓰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뇌 감각이 주도권을 회복한 뒤 좌뇌 생각을 다시 살려 두 기능을 상황에 맞게 함께 씁니다.
「재색명리의 추구에서 호연지기를 추구하는 삶으로」에서는 삶의 중심도 바뀝니다. 물질문명의 발전과 재물·지위·명예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밖의 획득만을 삶의 중심으로 두던 데서 안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쪽으로 무게를 옮깁니다.
형이상학은 과거와 미래의 생각, 근심과 불안에 끌려 자기 몸과 마음조차 다루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중심으로 심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공부입니다.
그 공부는 자기 소리를 듣고, 걸으면서 몸 전체를 감각하고, 원수와 은인의 양극을 자기 관계에서 통과하고, 심폐와 하단전의 작용까지 실제로 느끼는 생활에서 확인됩니다.
「봄나라 수행의 과정」에서는 송도·오이도·대부도·선재도·영흥도의 지명을 수행 단계의 상징으로 씁니다. 득음, 양극의 융합, 심폐와의 소통, 하단전의 중심, 영육의 개벽을 한 길로 기억하게 합니다.
이 지명들은 지리적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진행을 기억하고 말하기 위해 붙인 상징 체계입니다.
좌뇌 생각본위에서 우뇌 감각본위로 바뀌어 견성했다고 해도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가슴을 거쳐 하단전에 안착하여 몸을 실제로 운행하지 못하면 도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견성·양성·솔성도 그에 따라 나뉩니다. 견성은 본질의 공간과 빛을 보는 일, 양성은 그 중심과 힘을 길러 경계에서도 놓치지 않는 일, 솔성은 그 힘으로 생각·말·몸을 실제로 자유롭게 부리고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무한 공간과 본태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걸으면서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동시에 느끼는가, 말하면서 자기 말소리를 듣는가가 더 직접적인 시험이 됩니다. 개념은 몸의 실제 감각으로 되돌아옵니다.
천당과 극락도 사후 세계의 장소로만 두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 내면에서 직접 확인하는 경계 없는 무한 공간이 천당이고, 그 안에 가득한 명암일색의 은은한 광명이 극락입니다.
생사의 문제도 현재의 호흡에서 봅니다. 삶 다음에 죽음이 온다는 생각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호흡 안에서 고요한 정과 움직이는 동이 함께 있는 정중동을 통하여 생사를 봅니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적 생사일여를 육체적 죽음 자체가 없다는 말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하권은 정신의 부동·불변과 육체의 변화·죽음을 서로 다른 층위로 구별하는 흐름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원수가 은인인 도리」에서는 형이상학을 관계의 실제 시험으로 바꿉니다. ‘원수가 은인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지금 자기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형이상학의 이치는 자기에게 유리한 때만 맞는 말일 수 없습니다. 가장 싫은 사람, 판단을 흔드는 사람,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 앞에서 자기 몸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보아야 합니다.
「화를 내어 보면 결국 누가 화를 당하는가」에서는 화를 밖으로 던지는 순간 상대에게 닿기 전에 자기 몸과 마음이 먼저 충격을 받습니다. 분노를 도덕적으로 금지하기보다 그 힘이 자기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직접 감각합니다.
맹세와 억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욱하는 힘이 올라오는 바로 그 순간 안으로 보는 감각이 살아 있어야, 생각과 말이 폭발하기 전에 그 움직임을 보고 멈출 수 있습니다.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고정하는 습관도 문제 삼습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선입관에 따라 같은 사람을 좋게도 나쁘게도 볼 수 있으므로, 상대의 본질을 단정하기 전에 자기 판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봅니다.
그렇다고 선악의 구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해로운 행동과 잘못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을 곧바로 그 사람 전체의 고정된 본질로 만들어 미워하고 배척하는 데까지 가지 않습니다.
상생만 골라잡는 것조차 다시 한쪽에 붙드는 이분법이 될 수 있습니다. 「상극과 상생이라는 대립에서 융합으로」에서는 상극과 상생이 각각 언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고, 둘을 더 큰 관계 안에서 함께 씁니다.
생각을 지워 무심에 이르는 단계가 있지만, 그 무심에서 다시 생각을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어야 비로소 생각의 주인입니다. 생각과 감각의 협치는 생각의 소멸 뒤에 생각을 다시 살려 쓰는 데서 완성됩니다.
「송구영신」에서도 물질본위·생각본위의 옛 질서를 보내고 정신본위·감각본위로 중심을 바꾸되, 생각을 영구히 죽여두지 않고 감각과 생각을 협치시킵니다.
내면의 변화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의 포용 능력보다 상대의 결함만 먼저 보인다면 아직 자기 판단의 상대성에 끌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서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흠잡는 눈과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눈이 결국 자기 행복과 평화에도 돌아옵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곧 자기 마음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모든 사람의 정신이 본질에서 하나라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관계가 생활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개벽의 평등은 사람을 이용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서로 공경하는 데서 확인됩니다.
그래서 인간개벽은 자기 안에서 빛을 보는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려는 태도가 줄고, 나이·성별·인종·지위와 관계없이 같은 존엄을 인정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권의 인본주의도 외부 신을 부정하는 구호 하나가 아닙니다. 자기 안의 정신을 직접 보고 그 정신이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쓰는 삶의 주인이 되어, 외부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서는 길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다’가 자기 한 사람의 우월감으로 바뀌면 책의 평등 구조와 바로 충돌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신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의 주인됨과 다른 사람의 존엄이 동시에 서야 합니다.
숨죽임의 정, 가늘고 긴 날숨의 중, 저절로 일어나는 들숨의 동을 나누고 그 가운데 심장박동과 몸의 열·냉기를 감각합니다.
여기서 ‘중’은 정과 동 사이의 애매한 절충점이 아닙니다. 날숨이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정지의 바탕을 잃지 않는 미세한 정중동을 가리킵니다.
운기조식·화강수승·두냉족열을 심장·폐·하단전의 작용과 연결하고 통증·질병·회춘·장수까지 이어가는 매우 강한 건강·치유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원문 수행 체계의 주장으로 보존해야 하며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법과 섞어 소개할 수 없습니다.
「누진통」에서는 날숨을 급하게 내뿜지 않고 가늘고 길게 내쉬어 열기가 새지 않게 한다는 설명과, 심장박동과 뜨거운 혈액의 하강을 감각한다는 수행 이론이 나옵니다. 이 역시 원문의 호흡·기운 체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숨죽여봄도 새 고요를 억지로 만들어 오래 유지하는 기술로만 두지 않습니다. 이미 있는 정지의 바탕을 발견하고, 그 고요에서 호흡·생각·말·행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사실을 봅니다.
‘숨쉰다’는 일상어에서는 정지의 바탕과 움직임의 공존을 보고, ‘일없습니다’라는 말에서는 소아가 모든 일을 직접 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진 상태를 봅니다.
‘일없음’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정신이 호흡·생각·말·행동을 자동으로 운행하고 소아는 그 작용을 보고 압니다.
수동식 인간에서 자동식 인간으로 바뀐다는 말도 이 뜻입니다. 여기서 자동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잃어버리는 자동이 아니라 정신의 작용을 감각하면서 힘을 덜 들이고 살아가는 자동입니다.
외로움과 고독도 무조건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외롭고 심심하고 허전할 때 곧바로 오락과 자극으로 도피하지 않고 그 느낌을 직접 돌아보면 본연의 자기를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근심·걱정·불안·공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없애야 할 적으로 밀어내기보다 받아들이고 안아보면서 그 감정이 자기에게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 봅니다.
하권 후반의 중요한 장면 하나는 대화가 막히는 순간입니다. 상대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했을 때 곧바로 논파하려 하지 않고, 먼저 자기 안에서 치솟는 역정과 공격 욕구를 돌아봅니다.
그다음 왜 상대가 그런 말을 했는지 질문하고, 상대의 관점에서 가능한 뜻을 찾아보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감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일이 곧 자기 안의 벽을 허무는 공부가 됩니다.
여기서 생각은 다시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감정을 돌아보아 중심을 잡은 뒤에는 자문자답·유추·관점 전환을 위해 생각을 적극적으로 씁니다.
그래서 이 책의 형이상학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려는 공부가 아닙니다.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 정확하게 생각하고 묻고 설명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려는 공부입니다.
형이상학 공부의 목적은 자기 안의 무한 공간과 명암일색의 광명을 직접 보고, 그것이 사람의 정신이며 본질이라는 사실을 자기에게서 증명하는 견성에 있습니다.
그러나 견성 한 번으로 모든 공부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초견성 뒤에도 돌아봄이 생활에 정착되어야 하고, 감각의 구심력이 생각의 원심력에 밀리지 않아야 하며, 정신이 하단전에 안착하여 실제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즉각적인 한 소식과 오래 길러야 하는 양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처음 볼 수는 있어도 그 눈이 다시 감기지 않고 경계에서 힘을 쓰려면 반복과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하권에는 2020년 코로나19, 핵무기·핵융합, 인공지능을 물질개벽에서 정신개벽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징후로 읽는 강한 시대 해석이 나옵니다.
코로나19를 사람들이 밖으로만 향하던 관심을 안으로 돌리는 섭리적 계기로 보고, 특정 수의 수행자가 개벽하면 바이러스가 사라질 것이라는 강한 인과 주장도 원문에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원아 유종열님의 시대 해석과 주장으로 보존해야 하며 방역·의학적 사실과 같은 것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핵융합과 AI에 대해서도 핵분열 무기를 버리고 융합 에너지를 공유하는 미래, AI가 노동을 대신할수록 사람이 생각보다 감각과 정신을 계발해야 한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이 역시 집필 당시의 형이상학적 전망으로 읽어야 합니다.
형이상학은 마지막까지 사람 사이의 평등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신을 회복하여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신이 있음을 자기에게서 확인했다면 서로 공경하고 이용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관계가 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주종관계가 아닌 주인공의 길」은 이 결론을 압축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의 정신을 주인으로 삼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본위의 옛 사람이 정신본위의 신 인간으로」에서는 개과천선을 잘못 하나 고치는 도덕 훈계로 좁히지 않습니다. 존재의 중심이 소아·마음에서 대아·정신으로 바뀌는 전환입니다.
그 변화가 실제로 되었는지는 다시 분노에서 시험됩니다. 「욱하는 성질을 내지 않을 수 있는 까닭」에서는 대아·정신의 절대성에는 분노를 던질 고정된 상대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욱하는 성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하권 전체를 함께 읽으면 완성의 기준을 ‘감정이 영원히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한 문장으로 고정할 수 없습니다. 다른 여러 글에서는 감정과 몸의 동요가 일어나는 순간 즉시 돌아보고 평상심으로 회복하며, 생각을 선택적으로 쓰는 능력을 계속 요구합니다.
따라서 실제 생활에서는 ‘나는 화가 전혀 안 난다’는 선언보다 경계에서 자기 몸과 마음의 동요를 얼마나 빨리 보고, 그 힘이 말과 행동의 폭발로 번지는 것을 멈출 수 있는가가 중요한 확인이 됩니다.
마지막에는 정신을 생각과 감정처럼 계속 변하는 마음과 구별하여, 중심에서 밖으로 흩어지지 않는 부동심이라고 밝힙니다.
정신을 늘봄하면서 한 생각에 끌려가거나 희로애락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지를 평소에 스스로 확인합니다. 부동심은 마지막까지 생활에서 점검하는 정신의 기준입니다.
마지막 BOM-002756 「빛과 그림자와의 관계」에서는 남에게서 얻은 지식·정보와 자기에게서 직접 깨달은 이치를 가릅니다. 밖에서 배운 것은 빛을 가리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잊힐 수 있지만, 자기 안에서 직접 보고 깨달아 확인한 이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맺습니다.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하권)》의 마지막은 형이상학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본질을 자기에게서 직접 보았는가, 그 감각을 잃지 않은 채 생각을 자유롭게 쓰는가, 몸과 마음을 실제로 부리는가,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가, 경계에서 자기 분노를 돌아볼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상권이 봄나라 형이상학의 전체 구조를 세운 권이라면, 하권은 그 구조를 235편의 몸·말·관계·감정·호흡과 생활에 대입하여 실제 자기 것이 되었는지를 끝까지 확인하는 권입니다.
그래서 2,756편의 마지막 질문은 처음부터 이어져 온 물음과 같습니다. 남에게서 들은 것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몸과 마음과 삶에서 직접 보고 알고 인정한 것이 있는가. 지식과 깨달음의 차이를 자기에게서 확인하는 문제로 봄 글 전체가 끝납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하권)》은 상권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하권에서 삼위일체와 주객일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할 때
정신의 공간이 열렸다는 것을 어떻게 점검하는지 알고 싶을 때
걷기 돌아봄이 왜 절대공간을 여는 수행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자기 목소리를 듣는 낭독이 왜 중요한지 궁금할 때
생각을 없애는 것과 생각을 부려 쓰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때
도통이 좌뇌에서 우뇌로 바뀌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할 때
원수가 은인이라는 말을 실제로 어떻게 자기에게 대입하는지 궁금할 때
사람을 좋고 나쁜 사람으로 고정하면 안 된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은 이 책 후반에서 다시 어떻게 정의되는지 궁금할 때
숨쉬어봄·숨죽여봄·일없음은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할 때
생사일여는 실제 죽음이 없다는 뜻인지 궁금할 때
외로움과 고독을 이 책은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할 때
상대의 말에 화가 나 말문이 막힐 때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의 공부 목적을 왜 견성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형이상학을 왜 인본주의와 주인공의 길로 연결하는지 궁금할 때
정신개벽이 실제 인간관계의 평등과 비지배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할 때
욱하는 성질이 없어지는 기준을 이 책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할 때
정신을 왜 부동심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마지막 ‘빛과 그림자의 관계’가 책 전체에서 어떤 뜻인지 궁금할 때
코로나19·핵융합·AI에 관한 강한 시대 주장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궁금할 때
호흡·치유·두냉족열에 관한 강한 효능 주장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궁금할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봄나라 형이상학 전자책(하권)》은 상권과 무엇이 다른가요?
상권이 본질과 현상, 생각과 감각, 돌아봄·바라봄·늘봄을 ‘형이상학’이라는 한 구조로 세운 권이라면 하권은 그 구조가 몸·말·관계·감정·호흡과 생활에서 실제 자기 것이 되었는지를 시험합니다. 걸으면서 몸 전체가 한 공간으로 느껴지는가, 자기 목소리를 듣는가, 미워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가, 분노와 대화의 경계에서 돌아봄이 실제로 작동하는가가 기준입니다.
생각의 독재를 끝내기 위해 먼저 생각의 흐름을 비추어 무심에 이르는 단계가 있지만 그것이 최종은 아닙니다. 감각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는 필요한 생각을 다시 내어 자문자답하고 이치를 밝히고 말과 글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의 소멸은 협치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단계입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선입관에 따라 같은 사람도 좋게 보였다가 나쁘게 보일 수 있으므로, 사람 전체를 ‘좋은 사람·나쁜 사람’이라는 고정된 본질로 만들기 전에 자기 판단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보라는 뜻입니다. 해로운 행동과 잘못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을 사람 전체에 고정하여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은 구별합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읽으면 안 됩니다. 현재의 호흡에서 정지와 움직임이 함께 있는 정중동을 통해 생사를 다시 보려 하지만, 다른 글에서는 육체의 변화와 죽음을 현상으로 구별하고 정신의 부동·불변을 따로 봅니다. 따라서 생사일여는 수행적·형이상학적 해석이지 육체적 죽음 자체의 부정으로 바꾸어 소개할 수 없습니다.
외부 신이나 권위에 종속되는 대신 자기 안의 정신을 직접 깨닫고 그 정신이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쓰는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신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의 주인됨은 다른 사람의 존엄과 평등을 인정하는 것과 함께 가야 합니다.
「욱하는 성질을 내지 않을 수 있는 까닭」에서는 대아·정신 중심의 절대성에는 분노를 던질 고정된 상대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욱하는 성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글에서는 감정과 몸의 동요가 일어나는 순간 즉시 돌아보고 평상심으로 회복하는 힘을 계속 요구합니다. 따라서 생활에서는 경계의 반응을 얼마나 빨리 보고 언행의 폭발로 번지는 것을 멈추는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남에게서 얻은 지식·정보와 자기에게서 직접 깨달아 확인한 이치를 구별합니다. 외부에서 배운 것은 잊힐 수 있지만 자기 몸과 마음과 삶에서 직접 보고 안 이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2,756편의 마지막은 결국 남에게서 들은 것을 아는가, 자기에게서 직접 보고 알고 인정한 것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권에는 2020년 코로나19, 핵무기·핵융합, 인공지능을 물질개벽에서 정신개벽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징후로 보는 해석과, 감염병의 소멸이나 미래 사회에 관한 매우 강한 전망이 있습니다. LTOL에서는 이를 당시 원문에 기록된 시대 해석과 주장으로 보존하되 현재의 의학·과학·정치·경제 사실이나 예측과 섞지 않습니다.
원문에는 숨죽여봄·운기조식·화강수승·누진통을 통증과 질병의 치유, 두냉족열, 건강과 장수에 연결하는 강한 주장이 반복됩니다. LTOL에서는 이를 원문에 기록된 수행 체계의 주장으로 보존하되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 효과나 안전한 장시간 호흡 억제 방법으로 바꾸어 쓰지 않습니다.
235편 가운데 아래 스물네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상대성과 절대성, 주객일체와 공간 개방, 생각과 감각의 협치, 인간개벽 총괄, 도통의 추가 조건, 원수·분노·대화의 실제 시험, 낭독·걷기 돌아봄, 형이상학의 재정의, 숨쉬어봄과 일없음, 인본주의와 주인공의 길, 마지막 부동심과 빛·그림자의 결론까지 하권의 실제 진행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상대성과 절대성의 문제
상대성과 절대성의 차이는 주객이분과 주객일체, 생각과 감각의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보는 주체의 분리가 없는 감각의 봄이 핵심입니다.
상대방과 대화중 상대방이 쓰는 용어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듯 갑자기 말이 꽉 막히고 닫혔을 때 자기 안에 형성된 대화의 장벽을 어떻게 스스로 무너뜨리고 상대방과 차분하게 대화를 재개하여 소통하고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사태를 이끌어 상대방과 넉넉한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대화 중 상대의 말에 막히고 분노가 솟을 때 자기 감정부터 돌아본 뒤 질문·관점 탐색·이해로 소통을 다시 여는 구체적 순서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