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권에서 기른 부동력을 바탕으로, 하권은 멈춘 뒤 누가 주인이 되어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지를 끝까지 묻습니다. AI 시대의 생각 문제에서 출발해 암흑과 광명의 두 하늘을 모두 열고, 몰입을 주시로 바꾸며, 경계에서 즉각 가만히 있을 힘을 시험합니다. 마지막에는 본태양을 늘봄하며 생각·감각·소아·대아·암흑·광명까지 모두 살려 쓰는 영육쌍전의 둥근 사람을 세웁니다.
《가만히 있어봄(하)》는 상권에서 몸돌아봄·숨죽여봄·가만히 있어봄의 세 수행을 세우고 마음본위에서 정신본위로 바뀐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이제 문제는 멈춤 자체가 아니라, 주도권이 바뀐 뒤 호흡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실제로 어떻게 달라지는가입니다.
첫 글은 삶을 바라봄의 길과 돌아봄의 길로 나눕니다. 재색명리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 기대하며 밖으로만 향하는 길과, 밖의 성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고 자기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길을 대조합니다. 끝에서는 밖을 버리고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면서 동시에 돌아보는 삶으로 다시 합칩니다.
곧이어 당시 알파고와 인공지능의 등장을 인간 두뇌의 전환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기계가 생각의 기능을 빠르게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사람은 생각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줄 알고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을 때 멈출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AI는 이 책이 쓰이던 당시의 시대적 계기입니다. 핵심은 기계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생각 자체를 보고 다룰 수 있는 감각과 주시를 회복하여 생각과 기계를 도구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소아와 대아가 하나가 되는 방법」에서는 무심의 제로와 일심의 하나를 다시 연결합니다. 마음이 비어 무아·무심의 자리가 열리고, 그 빈자리에서 광명의 일심이 작용할 때 소아 안에 대아가 있고 대아 안에 소아가 있는 하나됨이 드러납니다.
대아가 소아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뒤에서는 소아·에고·생각도 자기 한계를 사무치게 알게 한 뒤 감각의 주도 아래 다시 살려 쓰는 존재로 돌아옵니다.
「나에게 있어 전지전능이란?」에서는 전지전능이라는 큰 말을 자기 심신의 범위로 좁힙니다. 전지는 자기의 호흡·생각·말·행동을 모두 알아차리는 능력이고, 전능은 생각을 내거나 내지 않고 몸을 움직이거나 멈추는 것을 자유롭게 부리고 쓰는 능력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안다는 막연한 전지전능보다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실제로 부리고 쓸 수 있는가가 완성의 시험이 됩니다.
생각과 감각의 관계도 더 깊어집니다. 생각모드에서는 갈까 말까, 할까 말까 하는 반대 생각이 서로 싸워 음양상극이 되지만, 감각이 중심을 잡으면 생각을 비추어 멈출 수도 있고 필요한 때에는 다시 살려 쓸 수도 있어 음양상생으로 바뀝니다.
따라서 ‘감각 위주’는 생각의 영구 폐기가 아닙니다. 생각이 주인 자리에서 감각을 억압하던 구조를 끝내고 감각이 중심을 잡아 생각을 도구로 살려 쓰는 주도권 전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의 나 깨닫기」에서는 돌아봄하는 ‘나’마저 별도의 주체로 붙들면 보는 마음과 행동하는 몸이 다시 둘로 갈라집니다. 돌아봄하는 자를 하나 더 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보면 행동과 관찰 사이의 틈이 사라지고 본래 둘이 아니었음을 봅니다.
에고는 사람과 사물을 볼 때 ‘보는 내가 있다’고 분리된 주체를 세우는 최초의 생각입니다. 그 자의식이 나와 남, 소유와 경쟁, 몰입과 도피를 낳습니다.
「가만히 있어보면」에서는 처음에 호흡·생각·말·동작을 그쳐보지만, 결론에서는 보는 나라는 에고 없이 다시 보고 듣고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정지는 활동을 영구히 끊는 것이 아니라 활동의 주체를 바꾸는 문입니다.
암흑의 하늘과 광명의 하늘도 한쪽을 버리는 관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탄과 하나님처럼 강하게 갈라놓지만, 뒤에서는 암흑이 물질문명을 이루는 데 한 역할과 공덕도 인정합니다. 광명만 선이고 암흑은 악이라는 구도를 넘어 둘의 쓰임을 함께 봅니다.
「암흑의 하늘님이시여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에서는 생각·분석·기억과 경쟁을 통해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을 발전시킨 암흑의 역할을 인정합니다. 앞에서 적대적으로 보았던 생각과 암흑이 선천 물질개벽을 담당한 힘으로 다시 들어옵니다.
마지막의 둥근 사람에서는 좌뇌와 우뇌, 생각과 감각, 소아와 대아, 가아와 진아, 암흑과 광명 가운데 하나만 옳다고 잡고 다른 하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감각이 중심을 잡되 생각·에고·암흑까지 살려 쓸 수 있어야 둥글어집니다.
교와 선도 같은 구조입니다. 감각으로 직접 본 것을 혼자 아는 데서 끝나면 다른 사람과 통하지 못합니다. 선의 감각으로 먼저 보고, 교의 생각과 언어로 본 것을 개념화하고 설명하여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해야 교선일체가 됩니다.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직접 감각한 것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 감각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공부의 한 축으로 세웁니다.
「내면의 하늘 열기」에서는 암흑과 광명을 차례로 엽니다. 생각의 먼지를 비추어 비우면 먼저 텅 빈 암흑의 하늘이 열리고, 거기에 머물러 억지로 밝히려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광명의 하늘이 열립니다.
암흑은 완성은 아니지만 악도 아닙니다. 생각을 쉬게 하고 깊은 휴식을 주는 역할이 있으며, 광명도 한쪽으로 붙들면 다시 치우침이 됩니다. 명과 암을 둘로 잘라 한쪽을 버리지 않는 성리가 여기서 다시 살아납니다.
「신통력이란?」에서는 신통력을 정신과 통하여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쓰는 능력으로 밝힙니다. 공중부양도 육체가 실제 하늘로 뜨는 초능력으로 믿는 해석을 원문에서 직접 부정하고, 자기 안의 하늘이 열려 정신과 통하는 문제로 돌립니다.
사람 사이의 탁마에서도 시비를 먼저 가리지 않습니다. 상대의 말이 맞다 틀리다부터 재판하면 공격과 방어가 반복되므로, 먼저 상대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를 듣고 자기 말로 다시 확인하여 이해하는 데 생각과 언어를 씁니다.
생각을 다시 살려 쓰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감각으로 상대의 뜻을 듣고, 생각과 언어로 그 뜻을 확인하고, 서로 다른 점을 보완하는 데 씁니다.
「깨달음과 믿음」에서는 정신이 몸을 움직이는 힘이 권한을 넘긴 뒤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이미 그 힘으로 살아왔음을 봅니다. 그 사실을 직접 깨달아야 몸과 마음을 정신에 맡길 믿음이 생깁니다.
따라서 가만히 있어봄은 의지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수행도 아닙니다.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호흡·몸동작·생각·말의 작용을 보고 아는 쪽으로 마음의 역할을 바꿉니다.
후반의 큰 시험은 ‘즉각 가만히 있어봄’입니다. 아무 경계가 없을 때 조용히 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비난·모멸·자극을 만났을 때 조건반사로 즉시 맞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를 종점의 기준으로 둡니다.
그렇다고 놀람이나 언짢음 같은 현상 반응 자체가 영원히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응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공격과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멈출 힘이 핵심입니다.
「생각이냐 감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에서는 주도권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생각은 분석·기억·추리와 감정 반응을 일으키고, 감각은 그것을 즉시 보고 압니다. 감각은 생각을 멈출 수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살려 쓸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늘봄한다는 말인가요?」에서는 생각을 관찰하는 데서 더 나아가 내면의 무변허공에 가득한 무량광명인 본태양을 늘봄합니다. 그 빛으로 자기 안의 폭풍과 불길 같은 생각·감정의 동요를 제도하는 것이 최종 늘봄입니다.
생각이 일어났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경계에서 부동의 힘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하늘과 본태양을 늘 보고 실제 동요를 가라앉힐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에서는 텅 빈 무한 공간을 정신의 정체성, 그 공간을 가득 채운 본태양의 광명을 정신의 주체성으로 나눕니다. 가만히 있어봄의 무심은 마음의 끝이면서 동시에 정신이 발현되는 시작점이 됩니다.
「가만히 있어봄은 마음의 끝인 동시에 정신의 시작입니다」에서 숨·생각·말·수족의 움직임을 그치는 까닭도 분명해집니다. 활동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주도하던 운행을 멈추고 정신이 몸을 부리고 쓰기 시작하게 하는 인계점입니다.
「정신의 개벽이 나에게 일어날 때까지의 전 과정 요약」에서는 생각이 감각을 억압한 상태에서 몸돌아봄으로 육체를 복원하고, 영체를 깨닫고, 생각을 다시 살려 쓸 수 있음을 알아 에고의 두려움을 풀고, 암흑과 광명의 하늘을 열어 심신 사용권을 정신에 맡기고 본태양을 늘봄하는 데까지 전 과정을 정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각은 죽인 뒤 버려두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시 살아도 감각이 중심을 잡고 필요할 때만 쓰기 때문에 예전의 상극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에고도 광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역할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작은 두뇌와 무한한 하늘, 과학과 도학, 견성·양성·솔성도 한 구조 안에서 다시 봅니다. 작은 몸 안에 큰 하늘이 들어온다는 말은 몸 안과 밖의 공간이 본래 하나라는 감각에서 나오며, 그 하늘을 보고 늘 보고 실제 심신을 부리고 쓰는 데까지 되어야 합니다.
「왜 가만히 있어봄이 합당한가?」에서는 미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자기를 모든 일의 행위자로 내세우지 않고 정신이 몸을 부리는 작용을 보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과 일을 힘을 덜 들여 합니다. 가만히 있어봄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영육쌍전」에서 정신과 육체가 어느 한쪽에 흡수되지 않고 정과 동, 명과 암, 온과 냉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함께 존재하는 상태가 자아완성과 정신개벽입니다.
「양극단 둘 다 용납하여 하나가 된 둥근 사람」에서는 에고·소아·생각·암흑까지 다시 살립니다. 에고가 자기 무능을 철저히 알아야 정신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 에고를 무작정 악이라 할 수 없고, 소아가 자라 대아가 되므로 소아를 깔보고 대아만 높여도 다시 모가 납니다.
좌뇌·생각·물질·암흑이 선천 물질문명을 이루고 우뇌·감각·정신·광명이 후천 정신개벽의 중심이 된다 해도 마지막은 한쪽의 승리가 아닙니다. 둘을 모두 용납하고 감각이 중심을 잡아 생각을 살려 쓰며 양극단을 하나로 운용할 때 둥근 사람이 됩니다.
두뇌의 전환 뒤에도 가슴이 냉랭할 수 있습니다. 자연 유람과 음악·미술의 감상으로 가슴의 정감을 살리고,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질 만큼 사랑이 살아난 뒤 정신이 하단전에 안착하는 길을 다시 확인합니다.
원문에는 숨죽여봄·운기조식이 무산소증·저체온·암·우울증 등을 예방·치유한다는 매우 강한 건강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원아 유종열님의 당시 수행 이론과 체험 주장으로 보존해야 하며, 검증된 의학 지식이나 안전한 호흡 지침으로 바꾸어 읽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후기에는 원아 유종열님이 여러 종교와 수행을 거친 뒤 일어서는 자기 몸동작을 우연히 알아차리면서 몸돌아봄이 시작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마음 돌아봄만으로 생각의 힘을 이기기 어려워 본격돌아봄으로 구심력을 기르고, 내면의 명암과 온냉을 부리고 쓰는 데까지 온 경로를 되짚습니다.
《가만히 있어봄(하)》는 가만히 정지해 있는 상태를 반복하는 책이 아닙니다. AI 시대의 생각 문제에서 시작해 감각이 생각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암흑과 광명의 두 하늘을 모두 열고, 몰입에서 주시로 돌아오며, 경계에서 즉각 가만히 있을 부동력을 기릅니다. 본태양을 늘봄하며 생각·감각·소아·대아·암흑·광명까지 모두 살려 쓰는 영육쌍전의 둥근 사람으로 맺습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상권과 하권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할 때
왜 이 책은 인공지능 시대에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소아와 대아는 어떻게 하나가 된다고 하는지 알고 싶을 때
전지전능을 이 책은 어떤 의미로 좁혀 쓰는지 궁금할 때
생각과 감각이 상극에서 상생으로 바뀐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돌아봄하는 나마저 놓아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암흑과 광명의 두 하늘은 왜 둘 다 필요한지 궁금할 때
교와 선, 감각과 언어가 왜 함께 필요하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신통력과 공중부양을 이 책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고 싶을 때
몰입과 주시는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시비를 가리는 탁마와 이해를 위한 탁마는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깨달음 뒤에 왜 믿음이 생긴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즉각 가만히 있어봄은 무엇을 시험하는지 알고 싶을 때
최종적으로 무엇을 늘봄한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정신개벽의 전체 과정을 한 번에 알고 싶을 때
왜 마지막에는 에고·소아·암흑까지 다시 살려 쓰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영육쌍전과 둥근 사람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할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봄(하)》는 어떤 책인가요?
상권에서 기른 부동력을 바탕으로 멈춘 뒤 누가 주인이 되어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지를 끝까지 묻습니다. AI 시대의 생각 문제에서 감각이 생각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암흑과 광명의 두 하늘을 모두 열며, 몰입을 주시로 바꾸고, 경계에서 즉각 가만히 있을 힘을 시험합니다. 마지막에는 본태양을 늘봄하며 생각·감각·소아·대아·암흑·광명까지 모두 살려 쓰는 영육쌍전의 둥근 사람으로 맺습니다.
상권은 몸돌아봄·숨죽여봄 다음에 가만히 있어봄을 세 번째 수행으로 세워 부동의 힘과 정신본위 전환을 분명히 합니다. 하권은 그 뒤 정신이 실제로 생각과 몸을 어떻게 부리고 쓰는지, 감각과 생각·암흑과 광명을 어떻게 함께 살리는지, 경계에서 즉각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를 끝까지 확인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의 나 깨닫기」에서는 돌아봄을 하는 ‘나’마저 붙잡으면 다시 보는 마음과 행동하는 몸이 둘로 갈라진다고 지적합니다. 돌아봄하는 자를 별도의 주체로 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보면 행동과 관찰 사이의 틈이 없고 본래 둘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암흑을 사탄, 광명을 하나님처럼 강하게 갈라 말하지만 뒤에서는 생각·분석·기억과 경쟁을 통해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을 만든 암흑의 공덕도 인정합니다. 광명만 선이고 암흑은 악이라고 고정하지 않고, 좌뇌·생각·소아·암흑과 우뇌·감각·대아·광명을 모두 살려 쓰는 둥금으로 맺습니다.
하권은 사람 사이의 대화에도 이 원리를 적용합니다. 「시비를 가리기 위해 탁마하지 말고 이해하기 위하여 탁마합시다」에서는 상대의 말이 맞느냐 틀리냐부터 따지면 공격과 방어가 반복된다고 보고, 먼저 상대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를 듣고 자기 말로 다시 확인하는 소통을 권합니다. 즉 생각을 다시 살려 쓰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각으로 상대의 뜻을 듣고, 생각과 언어로 그 뜻을 정확히 확인하며 서로의 다른 점을 보완하는 데 쓰는 것입니다.
생각이 감각을 억압한 상태에서 몸돌아봄으로 육체를 복원하고 영체를 깨닫습니다. 생각을 다시 살려 쓸 수 있음을 알아 에고의 두려움을 풀고, 암흑과 광명의 하늘을 연 뒤 심신 사용권을 정신에 맡기고 본태양을 늘봄하며 실제 생활을 부리고 씁니다. 생각은 없앤 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주도 아래 필요한 때 다시 씁니다.
에고가 자기 무능을 철저히 알아야 정신을 찾을 수 있었고, 소아가 자라 대아가 되며, 좌뇌·생각·물질·암흑도 선천 물질문명을 이루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을 악으로 버리고 다른 한쪽만 높이면 다시 모가 납니다. 감각이 중심을 잡아 양극단을 모두 살려 쓰는 것이 둥금입니다.
정신과 육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정과 동, 명과 암, 온과 냉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존재하는 것이 영육쌍전입니다. 가만히 있어봄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정신이 몸을 부리는 작용을 보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과 일을 힘을 덜 들여 하는 삶입니다. 이 둘을 함께 살리는 사람이 둥근 사람입니다.
93개 목차 항목 가운데 아래 열여덟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AI 시대의 생각 주권에서 시작해 감각·생각의 상생, 무심·일심, 암흑과 광명의 두 하늘, 교선일체, 신통력의 재정의, 몰입과 주시, 즉각 가만히 있어봄, 본태양 늘봄, 정신개벽 8단계, 영육쌍전, 양극단을 모두 살리는 둥근 사람과 후기까지 하권의 실제 진행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삶의 두 갈래길, 바라봄의 길과 돌아봄의 길 중, 어느 길로 가시렵니까?
외향의 바라봄과 내향의 돌아봄을 대조한 뒤, 마지막에는 바라봄 가운데 돌아봄하는 동시성으로 다시 합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