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싸움, 생각과 감각, 정신개벽의 이치를 다시 정리한 뒤 71번째 글부터 〈가만히 있어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몸돌아봄과 숨죽여봄을 지나 생각·말·몸동작을 그쳐 정신의 부동력을 기르고, 다시 호흡·생각·말·행동을 정신에 맡긴 채 마음은 그 움직임을 주시합니다. 마지막에는 이 역할 분담과 협동을 천인합일로 맺습니다.
이 순서는 육체를 먼저 회복한 뒤 육감으로 영체를 깨닫고 영육쌍전으로 가는 길과도 연결됩니다. 몸을 버리고 정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을 되찾고 그 몸을 통하여 정신의 힘을 확인합니다.
전반부의 큰 축 가운데 하나는 싸움입니다. 스트레스의 뿌리를 외부 압박 하나로만 보지 않고, ‘나는 옳다, 져서는 안 된다’는 자기 정당화와 자기 안의 싸움에서 찾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싸움부터 멎어야 남과의 싸움도 줄어듭니다.
사랑·자비·인의 실천도 추상적인 덕목으로 남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분열과 남과의 다툼을 실제로 그치는 행동으로 내려옵니다. 보는 자기와 보이는 자기, 과거의 잣대와 지금의 자기 사이의 싸움부터 끝냅니다.
여기서 ‘싸우지 않고 사는 힘’도 이미 싹틉니다. 막강한 힘은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공격을 받아도 즉시 들이받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힘입니다. 이 문제는 뒤의 《싸우지 않고 사는 사람》에서 더 크게 다루어집니다.
생각에 대해서는 강한 제한과 재사용이 함께 나옵니다. 한 생각을 내는 것 자체를 죄처럼 강하게 경계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다른 글에서는 생각을 영구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멈추고 필요할 때 다시 내어 쓰는 은현자재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생각하지 말라’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없습니다. 생각이 몸과 마음을 끌고 다니는 주인 자리에서는 내려와야 하지만, 이치를 밝히고 질문하고 설명하고 일을 처리하는 도구로는 다시 살아납니다.
도통도 한쪽 기능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막힌 통로가 열리는 일입니다. 몸과 두뇌, 감각과 생각 사이의 일방통행이 쌍방통행이 되어 어느 쪽도 막히지 않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밖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과 지식으로 찾고, 자기와 우주의 근본 문제는 안으로 자문자답하고 사유·사색하여 밝힙니다. 안을 보는 공부가 생각과 언어를 버리는 길이 아니라 생각을 제자리에서 쓰는 길임을 분명히 합니다.
몸을 놓치지 않게 하여 육체가 지금 여기에 실존하면 그 육체의 감각을 통해 영체·정신을 깨닫습니다. 그 뒤 정신이 몸과 마음을 거느리고 다스리고 부리고 씁니다.
「자기를 깨달아 몸과 맘 자유자재하게 부리고 쓰기까지 가는 길」은 몸돌아봄 → 육체 복원 → 무심의 정신 깨달음 → 영육이 하나인 자기 → 하단전 중심 → 호흡·몸·마음 자재의 순서로 이 과정을 압축합니다.
견성이나 정신의 발견도 곧 완성은 아닙니다. 머리의 냉철함에서 가슴의 따뜻함으로 내려오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상태와 하단전의 중심까지 정신이 몸에 안착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봄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는 수행의 목표를 세 가지로 분명히 합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과 괴로움을 실제로 다루고, 생각·분노·몸동작의 발동과 정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시험하며, 그 체험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밝힙니다.
정과 동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정적인 정신을 온전하게 하려면 가만히 있어봄이 필요하고, 동적인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걷기 운동도 필요합니다. 가만히 있음만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71번째 글 「가만히 있어봄이 어째서 정신력 함양이 되는가?」에서 비로소 제목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몸을 부스럭대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밖으로 흩어지던 원심력이 줄고 안으로 모이는 구심력과 부동의 힘이 커집니다.
이 가만히 있음은 멍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각의 그림자가 비어 어둡고 고요하면서 동시에 환한 무심, 명암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적적성성을 ‘멍텅굴’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만히 있어봄의 목적도 멈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멈출 수 있는 힘을 얻어야 생각을 내거나 내지 않고, 몸을 움직이거나 멈추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부동의 정신력은 다시 동을 제대로 쓰기 위한 힘입니다.
「가만히 있어봄으로 견성 양성 솔성하기」에서는 한 수행 안에 세 역할을 둡니다. 무변허공과 무량광명이 하나인 본심을 보는 견성, 부동의 힘을 충분히 기르고 안정시키는 양성, 그 힘으로 경계에서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부리고 쓰는 솔성입니다.
「가만히 있어봄이란?」에서는 몸돌아봄과 숨죽여봄을 앞의 두 수행으로 놓고 가만히 있어봄을 세 번째 최종 수행으로 세웁니다. 마음·소아가 모든 호흡·생각·말·행동을 직접 끌고 가려는 자리에서 내려오고 대아·정신의 작용으로 주도권을 넘깁니다.
그런데 숨을 그쳤는데 들숨이 저절로 다시 일어나도 실패가 아닙니다. 소아가 억지로 호흡하려는 작용을 그친 뒤 저절로 일어나는 호흡은 정신의 호흡이므로 ‘숨 그친 가운데 숨 쉼’입니다.
따라서 가만히 있어봄을 실제 호흡을 오래 틀어막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기술로 읽을 수 없습니다. 자동 호흡이 다시 일어나는 가운데, 하루 종일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그 바탕의 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숨죽여봄의 의미」에서는 이것을 호흡권의 인계라고 부릅니다. 마음·소아가 모든 것을 직접 하려는 자리에서 내려오고 정신·대아가 호흡과 몸의 작용을 맡습니다. 마음은 그 작용을 자세히 보고 알아차리는 주시자입니다.
맡김은 방치가 아닙니다. 정신이 저절로 일으키는 호흡과 몸동작을 마음이 더 세밀하게 보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아가 움직이고 소아가 주시하는 협동과 합작이 계속됩니다.
행복의 기준도 미래의 외적 성취에서 지금의 실존으로 옮겨옵니다. 돈·학위·지위·명성을 얻은 뒤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머리의 광활함과 고요함, 가슴의 맥박과 온기, 하단전의 호흡, 몸이 살아 있는 감각을 직접 누립니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을 볼 수 있는 주시력과, 자극 앞에서도 즉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부동력은 서로 다릅니다. 보는 능력이 있다고 멈출 힘까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격돌아봄으로 실제 힘을 다시 길러야 합니다. 밖으로 끌려가는 원심력을 이길 만큼 안으로 모이는 구심력을 길러 하단전 중심까지 파고들고, 자극이 와도 즉시 반응하지 않을 부동의 힘을 얻습니다.
정신개벽도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몸돌아봄과 숨죽여봄을 지나 가만히 있어봄에서 마음본위가 정신본위로 바뀌고, 그 전환이 매 호흡에서 기다림·맡김·주시로 반복되어 생활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어떻게 천인합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며 어째서 사람이 하늘이라고 하는가?」에서 육체 소아와 영체 대아는 둘이면서 하나인 자기입니다. 대아·정신이 움직이고 소아·마음이 그 움직임을 주시하는 역할 분담과 협동이 천인합일입니다.
《가만히 있어봄(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책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싸움을 보고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하고, 생각과 감각의 역할을 바로 세운 뒤, 몸돌아봄과 숨죽여봄을 통과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부동의 힘을 기릅니다. 그 힘으로 다시 호흡·생각·말·행동을 자연스럽게 부리고 쓰는 정신본위의 삶을 삽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왜 《가만히 있어봄(상)》은 처음부터 가만히 있어봄만 설명하지 않는지 궁금할 때
이 책에서 스트레스와 싸움의 근본 원인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을 때
사랑·자비·인을 왜 ‘싸우지 않고 살기’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몸돌아봄·숨죽여봄·가만히 있어봄은 어떤 순서인지 알고 싶을 때
생각을 그치라고 하면서 왜 다시 생각을 쓰는지 궁금할 때
가만히 있어봄이 왜 정신력 함양이라고 하는지 알고 싶을 때
가만히 있어봄으로 견성·양성·솔성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가만히 있어봄은 실제로 아무 호흡도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할 때
숨그치기 뒤 다시 숨이 들어오면 실패인지 궁금할 때
호흡권을 정신에 넘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가만히 있음과 걷기 운동은 서로 반대인지 궁금할 때
주시만 잘하면 왜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지 궁금할 때
본격돌아봄과 부동의 힘은 왜 다시 필요한지 알고 싶을 때
이 책에서 행복은 무엇으로 확인하는지 알고 싶을 때
가만히 있어봄이 왜 정신개벽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마지막의 천인합일은 어떻게 설명되는지 알고 싶을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봄(상)》은 어떤 책인가요?
스트레스와 싸움, 선악, 사랑, 생각과 감각, 정신개벽의 이치를 먼저 다시 보고, 71번째 글부터 〈가만히 있어봄〉으로 생각·말·몸동작을 그쳐 부동의 정신력을 기르는 제17권 상권입니다. 몸돌아봄과 숨죽여봄 다음에 가만히 있어봄을 세 번째 수행으로 세우고, 그 안에서 견성·양성·솔성, 호흡권의 인계, 주시와 부동력, 본격돌아봄을 다시 확인합니다. 마지막에는 대아가 움직이고 소아가 주시하는 역할 분담과 협동을 천인합일로 밝힙니다.
가만히 있을 힘이 왜 필요한지 알기 전에 몸과 마음, 생각과 감각의 관계부터 바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와 싸움, 생각과 감각의 상극·상생, 심신일여와 영육쌍전,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쓰는 자재를 먼저 확인한 뒤 71번째 글에서 가만히 있어봄이 정신력을 기르는 수행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외부 압박 자체보다 ‘나는 옳고 져서는 안 된다’는 자기 안의 고정관념과 싸움이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입니다. 생각 돌아봄으로 자기 판단과 반사적인 저항을 보고, 먼저 자기 안의 싸움을 그치면 타인과의 싸움도 줄어듭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스트레스와 싸움을 보는 관점입니다.
추상적인 사랑의 감정보다 실제로 자기와 싸우지 않고 남과 싸우지 않는 행동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잣대로 현재의 자기를 심판하는 싸움, 보는 자기와 보이는 자기의 분열부터 끝내고,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걸어도 곧바로 맞받지 않는 데까지 가야 사랑과 자비가 실천됩니다.
생각이 주인이 되어 몸과 감각을 억누를 때는 먼저 그 생각을 멈출 수 있어야 하지만, 생각 자체를 영구히 없애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각이 주도권을 되찾은 뒤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설명하거나 필요한 일을 처리할 때 생각을 다시 내어 쓰고, 필요 없을 때 거둘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말·몸동작이 그친 가운데 무변허공과 무량광명이 하나인 본심을 보는 것이 견성이고, 그 부동의 정신력을 충분히 기르고 안정시키는 것이 양성이며, 필요할 때 가만히 있을 수 있고 필요할 때 다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심신을 자유롭게 부리는 것이 솔성입니다.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계속 보는 능력과, 실제 경계에서 끌려가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힘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주시할 수 있어도 모멸감이나 자극에 바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본격돌아봄으로 원심력을 이길 구심력과 하단전 중심의 부동력을 따로 길러야 합니다.
마음이 몸과 호흡을 일일이 주도하던 마음본위의 질서가 끝나고, 정신이 호흡·생각·말·행동을 맡으며 마음은 그 작용을 주시하는 정신본위의 질서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내지 않고 매 호흡에서 인계하고 기다리고 알아차리는 생활이 익어야 정신개벽이 자기 것이 됩니다.
원문에는 운기조식·숨그치기·가만히 있어봄을 체온 조절, 질병 치유, 면역력, 무병장수와 연결하는 강한 주장이 여러 글에 있습니다. LTOL에서는 이를 원문에 기록된 수행 체계의 주장으로 보존하되,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 효과나 안전한 장시간 숨참기 방법으로 바꾸어 쓰지 않습니다.
101개 목차 항목 가운데 아래 열일곱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정신개벽 선언과 싸우지 않는 삶, 생각·감각의 상생, 몸과 마음 자재, 가만히 있어봄의 등장, 견성·양성·솔성, 숨그치기의 재정의, 호흡권의 인계, 주시와 부동력의 차이, 마지막 정신개벽과 천인합일까지 상권의 실제 진행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정신개벽의 원년임을 선포합니다 (2015년 8월16일)
몸돌아봄·숨죽여봄·가만히 있어봄을 하나의 수행 순서로 묶고 심신일여→육체 복원→영체 깨달음→영육쌍전의 길을 선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