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유무·명암·동정의 한쪽을 붙잡아 모가 난 삶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잃어버린 육체를 되찾고 그 육체 안팎의 영체까지 깨달아 영육쌍전의 둥근 사람이 됩니다. 이치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호흡·몸·마음 자재와 본격돌아봄의 힘을 갖추며, 마지막에는 실제 언행과 관계에서 둥금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둘이 하나가 된 둥근 사람》은 앞 권 마지막의 ‘모남과 둥금’에서 시작합니다. 크고 작음,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 움직임과 고요 가운데 한쪽만 붙잡고 다른 쪽을 배격하면 모가 나고, 양극을 함께 보아 균형과 조화로 쓸 수 있을 때 둥글어집니다.
둥금은 차이를 없애 모두 똑같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있고 밝음과 어둠도 함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붙잡히지 않고 둘을 함께 받아들여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는 힘이 둥금입니다.
그 근거는 내면의 하늘에서 찾습니다. 몸 안으로 돌아보아 만나는 하늘에서는 무한대와 무한소, 텅 빔과 충만, 암과 명, 정과 동이 한 공간에서 포개집니다. 서로 반대라고 여겼던 둘이 하나의 바탕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는 데서 둥금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둥근 사람은 성격이 무조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밖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안을 돌아보고,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며, 본질과 현상·밝음과 어둠·움직임과 고요를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책 초반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분열을 실제로 다룹니다. 생각이 몸을 끌고 다니고 몸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상태에서 벗어나, 몸동작과 호흡을 감각하며 마음이 몸을 놓치지 않는 심신일여를 이룹니다.
생각도 없애야 할 적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이 몸과 감각을 누를 때에는 감각이 주도권을 되찾아야 하지만, 그 뒤에는 필요한 생각을 다시 살립니다. 감각의 구심력과 생각의 원심력이 서로 협동해야 실제 생활을 운행할 수 있습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에서는 생각과 말이 끊어진 자리를 막연한 신비로 남겨두지 않습니다. 신발이 발에 맞는지 신어보면 즉시 아는 것처럼 자기 몸과 마음의 상태는 몸의 지성·육감·영감으로 바로 압니다. 다만 길을 궁구하고 설명하고 전할 때에는 생각과 언어가 다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감각과 생각의 역할이 갈립니다. 자기 상태와 본질을 직접 확인할 때에는 육감과 영감을 쓰고, 이치를 궁구하고 길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에는 사유와 언어를 씁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남기지 않습니다.
「닦고 통하고 증하는 세 가지 길」에서는 사유·사색으로 길을 닦고, 길이 열린 뒤에는 감각으로 즉시 통하며,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때 증한다고 합니다. 직접 통하기 전의 사유는 길을 내고, 직접 본 뒤의 사유는 본 것을 밝히고 전하는 데 쓰입니다.
명암도 둥금의 실제 예가 됩니다. 낮에는 밝음 속 어둠인 명중암이 있고 밤에는 어둠 속 밝음인 암중명이 있습니다. 밝음과 어둠을 서로 죽이는 적으로 보지 않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명암일색으로 봅니다.
낮과 밤, 활동과 휴식도 같은 구조입니다. 밤에는 자면서도 밝음이 살아 있는 숙면일여가 있고, 낮에는 활동하면서도 깊이 쉬는 듯한 안락이 있습니다. 활동만도 휴식만도 아닌 두 힘의 공존을 몸에서 확인합니다.
이 균형은 호흡·몸·마음의 실제 능력으로 시험됩니다. 호흡자재는 호흡의 흐름을 알고 필요에 따라 심신의 상태를 다루는 힘, 몸자재는 움직일 수도 멈출 수도 있는 힘, 마음자재는 생각을 낼 수도 멈출 수도 있는 힘입니다.
원문에는 숨이 끊어짐, 생사의 고비 가까이 가는 호흡 수행, 질병 치유와 무병장수까지 연결하는 강한 주장도 나옵니다. 이 내용은 원아 유종열님의 수행 체계 안에서 나온 주장으로 보존해야 하며, 위험한 숨참기나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법으로 바꾸어 읽을 수 없습니다.
호흡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호흡 그 자체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장 미세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몸의 작용인 호흡까지 놓치지 않을 만큼 감각이 살아나면 생각·말·몸동작의 돌아봄도 함께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신일여로 먼저 생각에 가려 놓쳤던 육체를 되찾습니다. 그 육체를 통해 육감이 살아나 몸 안팎의 경계 없는 하늘과 영체를 깨닫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다음에는 육체와 영체가 하나임을 직접 아는 영육쌍전이 남습니다.
표제 글 「둘이 하나가 된 둥근 사람」에서 몸과 마음의 둘이 하나가 되어 육체를 되찾고, 그 육체 안에 영체가 있고 영체 안에 육체가 있음을 봅니다. 육체와 영체의 둘까지 하나가 될 때 둥근 사람이 됩니다.
그 결과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대소·유무·상하·갑을 가운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며,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덕분으로 자기가 살아감을 알고 공경합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임을 안다’는 이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치를 설명할 수 있어도 실제로 몸과 마음을 한데 모을 구심력과 집중력이 없으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반대로 힘만 있고 그 이치를 말과 글로 풀어 다른 사람과 통하지 못해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치와 기운, 교학과 수행, 설명과 실제 능력도 다시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둥금은 이해한 내용을 몸에서 작동시킬 힘과, 몸에서 확인한 것을 정확하게 밝힐 언어가 함께 있을 때 온전해집니다.
심신일여가 되어도 역경계를 만나 흔들리지 않을 힘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밖으로 나가는 힘보다 안으로 돌아오는 힘이 훨씬 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본격돌아봄으로 구심력을 길러 실제 힘을 얻는 공부가 다시 필요해집니다.
본격돌아봄은 일상에서 가볍게 한두 번 주의를 돌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밖으로 밀려나는 원심력을 이길 만큼 구심력을 길러 중심을 실제 힘으로 만드는 강한 집중의 과정으로 기록됩니다.
득력은 움직이는 힘만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가속기와 브레이크가 모두 있어야 하듯, 움직일 힘과 멈출 힘, 생각을 낼 힘과 내지 않을 힘, 반응할 힘과 맞받지 않을 힘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경계를 당해서 요지부동하기」에서는 깨달았다고 비난을 받아도 놀라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 목석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놀라고 언짢고 몸의 반응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말과 행동으로 맞받지 않을 수 있으면 됩니다.
둥근 사람의 부동함은 반응이 전혀 없는 무감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중정입니다. 감정과 신체 반응이 일어나더라도 그 반응에 끌려가 상대를 공격하지 않을 힘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봄에도 두 고개가 있습니다. 돌아봄을 놓쳤다고 자책하지 않고 놓친 줄 안 순간 즉시 다시 보는 것이 첫째 고개이고, 잡았다 놓쳤다 하는 현상 자체가 사라져 몸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둘째 고개입니다.
그 뒤에는 육체가 지금 여기에 실존함을 더욱 분명히 알고, 되찾은 육체를 통하여 영체를 깨닫습니다. 육체를 버려 영체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먼저 되찾아야 영육쌍전으로 갈 수 있습니다.
둥금은 표제 글에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실제 태도에서 계속 시험됩니다. 자기의 고귀함과 존엄을 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성질을 내면 생활에서는 아직 둥글지 않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평등을 자기 말과 행동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외부 스승의 인가보다 자기 언행을 실제로 보는 ‘자가 인가’도 나옵니다. 짜증과 험담을 줄였는가, 남을 먼저 건드리지 않는가, 공격을 받아도 맞받지 않을 수 있는가를 자기 생활에서 확인합니다. 자기 믿음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얻는 믿음입니다.
「도란 결국 자동화시스템으로 가는 길입니다」에서는 생각으로 일일이 몸과 마음을 조작하는 마음본위의 삶을 수동에, 정신의 감각이 몸과 마음을 저절로 운행하는 정신본위의 삶을 자동에 견줍니다.
이 자동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놓치는 자동과 반대입니다. 돌아봄으로 정신과 몸이 연결된 뒤 호흡·생각·말·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필요할 때는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동입니다. 유위로 닦은 끝에 무위의 자동이 익습니다.
마지막은 아주 구체적인 서원으로 돌아옵니다. 먼저 자기가 아직 모난 사람임을 보고 인정해야 둥근 사람이 되겠다는 서원이 생깁니다. 안으로는 마음이 몸의 움직임을 즉시 보아 심신일여를 이루고, 밖으로는 남을 먼저 건드리지 않고 건드려져도 맞받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활에서 점검합니다.
《둘이 하나가 된 둥근 사람》은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관념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둘을 실제로 하나로 만들고, 육체를 되찾아 그 안팎의 영체를 깨달아 영육쌍전을 이룹니다. 호흡·몸·마음의 자재와 본격돌아봄의 힘을 갖추고, 이치와 기운을 함께 익혀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 반응까지 다스릴 수 있을 때 ‘둘이 하나’가 몸과 생활에서 증명됩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모난 사람과 둥근 사람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둘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싶을 때
명암일색과 둥금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할 때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심신일여 다음에 왜 영육쌍전이 필요한지 궁금할 때
언어도단의 입정처를 이 책은 어떻게 풀어내는지 알고 싶을 때
생각과 감각은 각각 어디에 쓰는지 알고 싶을 때
호흡자재·몸자재·마음자재가 무엇인지 궁금할 때
닦고 통하고 증한다는 세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깨달아도 경계에서 몸과 감정이 흔들릴 수 있는지 궁금할 때
본격돌아봄은 왜 심신일여 뒤에도 다시 필요한지 알고 싶을 때
이치와 기운을 둘 다 갖춰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둥근 사람의 자기 믿음은 무엇으로 확인하는지 알고 싶을 때
왜 마지막에 도를 자동화시스템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둥근 사람이 되기 위한 마지막 서원은 무엇인지 궁금할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 둥근 사람》은 어떤 책인가요?
대소·유무·명암·동정의 한쪽만 붙잡는 모남에서 벗어나 양극을 함께 보고 쓸 수 있는 둥금을 몸과 생활에서 실제로 이루는 책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심신일여로 육체를 되찾고, 그 육체를 통해 영체를 깨달아 영육쌍전을 이룹니다. 그 뒤에도 호흡·몸·마음 자재, 본격돌아봄의 득력, 이치와 기운, 자기 언행의 자가 인가를 거쳐 정신본위의 무위가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데까지 확인합니다.
첫째는 행동하는 몸과 생각하는 마음이 따로 놀던 기능적 분열이 사라져 몸의 행동을 마음이 동시에 알아차리는 심신일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렇게 회복한 육체를 통해 몸 안팎의 영체를 깨달아 정신과 육체가 하나임을 아는 영육쌍전입니다. 이 두 합일을 거쳐야 둥근 사람입니다.
사유와 사색을 안으로 돌려 본질에 이르는 길을 내는 것이 닦음, 길이 열린 뒤 한 생각을 넘지 않고 몸의 지성·육감·영감으로 즉시 연결되는 것이 통함, 그 상태를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증함입니다. 통하고 증한 뒤에는 다시 생각과 언어로 본 것을 정확히 밝히고 전합니다.
이치는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길을 생각과 글·말로 밝히는 교학입니다. 기운은 실제로 둘로 흩어지는 힘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력·집중력이며 몸돌아봄·마음돌아봄·본격돌아봄에서 얻습니다. 설명만 있고 힘이 없어도, 힘만 있고 이치를 밝힐 수 없어도 온전한 둥금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호흡·말·행동을 하나하나 조작하는 마음본위의 삶은 수동이고, 돌아봄으로 정신과 몸이 연결된 뒤 감각을 바탕으로 호흡·생각·말·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정신본위의 삶은 자동이라는 뜻입니다. 유위로 애써 닦은 힘이 익어 무위로 저절로 작동하는 상태가 자동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