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욕심·게으름·화 같은 생활 문제에서 시작해 감각과 생각의 관계를 다시 세우고,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 보는 능력을 넓혀 내면의 하늘을 엽니다. 2→1→0으로 본질에 들어간 뒤 0→1→2로 다시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쓰고, 마지막에는 바라봄과 돌아봄을 동시에 하여 안과 밖, 본질과 현상, 양극을 함께 보는 둥근 사람을 세웁니다.
원아 유종열님 · 봄나라
책 소개
내면의 하늘을 보고, 다시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쓰기까지
《내면의 하늘 보기》는 고민·욕심·게으름·어리석음·재색명리·화처럼 바로 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부터 시작합니다. 생각끼리 싸우며 문제를 없애려 하기보다, 지금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무슨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감각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그 생각과 씨름하기보다 움직이는 몸을 보고, 화가 터진 뒤 후회하기보다 화가 올라오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먼저 봅니다. 문제를 또 다른 생각으로 억누르는 대신 실제 반응을 감각하여 생각의 분열에서 빠져나옵니다.
감각이 생각을 억압하는 또 다른 독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각이 중심을 잡은 뒤에는 생각을 다시 살려 원인을 궁구하고, 본 것을 개념으로 정리하고, 말과 행동으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감각으로 보고 생각으로 밝히며, 그 생각과 행동을 다시 감각하는 합작이 필요합니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에서는 보는 능력을 다섯 층으로 넓힙니다. 육안은 현상을 보고, 천안은 허공과 광명의 본질을 보고, 혜안은 그 빛으로 마음을 비춥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본 것을 생각과 언어로 논리 있게 풀어 다른 사람과 통할 수 있어야 법안이 열립니다.
불안에서는 안과 밖의 주객이 따로 남지 않습니다. 크고 작음, 있음과 없음 가운데 어느 한쪽만 붙잡지 않고 몸과 마음의 움직임까지 함께 보며 하나의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내면의 하늘 보기’는 눈을 감고 신비한 영상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자기 생각·말·몸동작에도 비추어, 밖을 보면서 안을 보고 안을 보면서 밖을 보는 눈을 여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도 한 부분만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몸 한 곳이나 한 생각만 간헐적으로 보이지만, 돌아봄이 익으면 부분과 전체가 함께 명료해지고 자기의 넓음·고요함·맑음·밝음을 전체적으로 압니다.
놓침 없는 수행도 눈을 한순간도 깜박이지 않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놓쳤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다시 볼 수 있을 만큼 자기를 보겠다는 일심이 살아 있으면 됩니다. 놓쳤다고 자기를 심판하는 대신 놓침까지 보고 다시 돌아옵니다.
중반에는 생각과 감각을 2·1·0의 구조로 풉니다. 반대 생각을 낳으며 갈라지는 생각의 작용이 2라면, 갈라진 둘을 통하게 하는 감각은 1이고,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구별마저 사라진 무심은 0입니다.
하지만 2→1→0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봄나라 성리의 완성」에서는 0→1→2로 다시 나오는 길을 한 쌍으로 세웁니다. 분열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무심의 0에 이른 뒤, 그 무심에서 일심을 내어 다시 생각·말·행동과 몸·마음을 부리고 씁니다.
그래서 무심과 일심은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습니다. 무심은 텅 빈 바탕과 정체성이고, 일심은 그 바탕에서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멈추며 생각을 내고 거두는 생활의 주체성입니다. 바탕만 있고 힘이 없거나 힘만 있고 바탕을 잃어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물어져야 본질을 볼 수 있지만, 생각 사이의 잠깐 빈틈을 본 것을 본질의 하늘로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바깥 하늘이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나는 것과 달리 내면의 본질은 생각이 있든 없든 늘 바탕으로 있습니다.
생각을 다물게 하는 목적도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생각으로 궁구할 만큼 궁구해 그 한계를 본 뒤에는 필요할 때 생각을 내고 필요 없을 때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감각을 바탕으로 생각을 자유롭게 다시 씁니다.
머리가 텅 비는 것만으로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머리는 비어 냉철하면서 가슴에는 사랑의 정감과 온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실제 성질·기질·체질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바꾸어야 그 공부의 덕이 생활에 드러납니다.
내면의 하늘을 허공과 광명 가운데 한쪽으로만 잡지 않습니다. 어둠만 붙잡는 하늘도, 밝음만 붙잡는 하늘도, 아무것도 없는 무기공도 한쪽에 치우칩니다. 어두움 속 밝음과 밝음 속 어두움이 함께 있는 명암일색이 내면의 하늘입니다.
산란할 때는 빈 하늘을 보고, 혼침할 때는 광명을 씁니다. 하늘과 광명 어느 하나를 고정해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태에 따라 명암을 부리고 써 적적성성의 균형을 맞춥니다. 본질을 본 힘이 생활에서 실제로 쓰입니다.
앞 권에서 중심이었던 숨죽여봄도 최종 목표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숨죽여봄은 생각모드에서 감각모드로 바뀌는 전환점입니다. 생각이 비어 감각이 살아나면 호흡·자기 말소리·몸동작이 저절로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몸을 통제하려는 오래된 힘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몸의 주인인 정신을 믿어 몸을 맡기고, 마음은 정신이 몸을 움직이는 작용을 비추고 알아차리는 주시자가 됩니다.
이 구조를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도 구별합니다. 정신이 몸의 주인이고 마음은 그 작용을 보는 역할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는 공부’라면, 경계 속에서 마음이 통제권을 내려놓고 실제로 맡기고 구경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 ‘길들이는 공부’입니다.
몸과 마음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와도 정신을 믿고 맡기고, 마음은 몸을 따라가며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습니다. 도학의 공부는 개념정리에서 끝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오래된 주종관계가 실제 생활에서 바뀌어야 합니다.
정신은 몸의 주인이고 마음은 그 작용을 회광반조하여 비추는 역할을 맡습니다. 사람을 정신 하나만으로 잘라 말하지 않고 정신·몸·마음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사람을 이룹니다.
「봄나(절대무)를 깨닫는 순서」에서는 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보이는 몸도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본 뒤, 몸 안의 작은 하늘과 몸 밖의 큰 하늘이 하나인 진공을 봅니다. 텅 빈 무와 그 안에 가득한 광명이 포개어진 대소유무의 하나를 ‘봄나’라고 부릅니다.
몸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통로입니다. 몸 밖의 거대한 하늘만 보아서는 전체가 아니며, 자기 몸 안의 작은 허공까지 포함하여 안과 밖이 하나인 하늘을 볼 때 존재의 고향을 몸과 함께 확인합니다.
본질을 보았다는 체험보다 실제 사용 능력을 계속 시험합니다. 생각과 말의 발동과 정지, 몸의 움직임과 멈춤, 호흡의 들고 남을 자유롭게 하고, 성공과 실패·득과 실에 끌리지 않으면서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해낼 수 있는지가 기준입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체험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갈등과 공격 속에서도 무심이 살아 있는가, 마음이 몸을 부리려는 습관이 실제로 내려놓아졌는가, 생각을 낼 수도 멈출 수도 있는가,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가를 생활에서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장벽도 다시 걷어냅니다. 정신을 완벽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해야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 몸과 마음을 실제로 비추고 보살피는 작용부터 쓰는 것이 곧 정신을 쓰는 일입니다.
바라봄과 돌아봄이 동시에 작동하면 밖만 보던 주객의 분열도 달라집니다. 밖만 바라보면 보는 나는 풍경 밖에 남지만, 바라보면서 동시에 돌아보면 자기 몸과 마음도 같은 현상 안에 들어옵니다. 자연과 나, 주관과 객관이 하나의 장 안에서 보입니다.
육안으로 밖의 사물을 보면서 심안·영안으로 자기 몸과 마음을 동시에 보면 내외명철이 됩니다. 밝음 속의 어둠, 움직임 속의 부동, 있음 속의 없음, 소리 속의 침묵, 아픔 속의 아프지 않음을 한꺼번에 보는 눈이 열립니다.
밝음 속의 어둠, 움직임 속의 부동, 있음 속의 없음, 소리 속의 침묵, 아픔 속의 아프지 않음을 한꺼번에 보면 앞에서 말한 치유와 진보도 새롭게 보입니다. 양극이 본래 균형과 조화로 하나임을 보면 인간은 새로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구원된 존재이고, 안락도 새로 만들어내기보다 본래 있는 안락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글은 이 모든 흐름을 ‘둥금’으로 맺습니다. 크고 작음,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 움직임과 고요, 생과 사, 성공과 실패 가운데 한쪽을 잡고 다른 쪽을 배격하면 모가 납니다. 양극을 함께 보고 균형과 조화로 상생할 때 둥글어집니다.
《내면의 하늘 보기》는 내면의 신비한 장면을 찾아보는 책이 아닙니다. 생활의 고민에서 시작해 감각의 눈을 열고 생각을 끝까지 쓴 뒤 다시 다물며, 2→1→0으로 본질에 들어갔다가 0→1→2로 몸과 마음을 부리고 씁니다. 마지막에는 바라봄과 돌아봄을 동시에 하여 본질과 현상, 안과 밖, 양극의 둘을 한꺼번에 보는 둥근 사람을 세웁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왜 이 책은 내면의 하늘보다 고민·욕심·게으름·화부터 다루는지 궁금할 때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을 이 책은 어떻게 구별하는지 알고 싶을 때
내면의 하늘을 본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보는 것인지 궁금할 때
자기를 전체적·종합적으로 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왜 생각이 다물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다시 생각을 쓰라고 하는지 궁금할 때
2→1→0과 0→1→2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을 때
무심과 일심은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궁금할 때
내면의 하늘에서 어둠과 광명을 왜 함께 본다고 하는지 알고 싶을 때
숨죽여봄이 이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할 때
아는 공부와 길들이는 공부는 무엇이 다른지 알고 싶을 때
정신·몸·마음은 어떻게 역할을 나누는지 궁금할 때
‘봄나’를 깨닫는 순서는 어떻게 설명되는지 알고 싶을 때
바라봄과 돌아봄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
마지막에 말하는 ‘둥근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면의 하늘 보기》는 어떤 책인가요?
종이책으로 발행되지 않고 온라인으로 공개된 봄나라 제15권으로 164편의 글이 있습니다. 고민·욕심·게으름·화 같은 생활 문제에서 시작해 감각과 생각의 관계를 다시 세우고,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 보는 눈을 넓힙니다. 2→1→0으로 본질을 보고 0→1→2로 다시 몸과 마음을 부리고 쓴 뒤, 마지막에는 바라봄과 돌아봄을 동시에 하여 본질과 현상, 양극의 둘을 함께 보는 ‘둥금’으로 맺습니다.
내면의 하늘을 관념으로 아는 것보다 지금 생활에서 생각과 감각이 어떻게 갈라지고 몸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먼저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민을 피하지 않고 탐구하고, 하기 싫다는 생각과 싸우기보다 움직이는 몸을 보고, 화를 억누르기 전에 몸과 마음의 반응을 알아차리면서 자기 안의 분열을 실제로 확인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육안은 물질 현상을 보는 눈, 천안은 허공과 광명의 본질을 보는 눈, 혜안은 그 광명으로 마음을 비추는 지혜의 눈입니다. 법안은 본 것을 생각과 언어로 논리 있게 밝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이고, 불안은 주객이 하나인 가운데 몸과 마음까지 놓치지 않고 평등하게 보고 그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눈입니다.
외부 하늘의 어떤 모양을 상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말·몸동작을 돌아보는 감각의 눈을 열어 생각의 바탕에 늘 있는 텅빔·고요함·맑음·밝음을 직접 감지합니다. 뒤에서는 밝음이나 어둠 어느 한쪽만 붙잡지 않고, 어둠 속 밝음과 밝음 속 어둠이 함께 있는 명암일색을 내면의 하늘로 밝힙니다.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는 그 바탕의 침묵을 직접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탐구를 할 만큼 다해 생각이 스스로 다물어지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영원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침묵을 바탕으로 필요할 때 생각을 내고 필요 없을 때 거둘 수 있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2는 보는 마음과 보이는 몸, 주관과 객관이 둘로 갈라진 분열입니다. 그 거리감이 사라져 하나가 되는 것이 1이고, 보는 자와 보이는 자라는 구별마저 사라진 무심이 0입니다. 그러나 0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일심 1을 내어 생각·말·행동과 몸·마음 2를 자유롭게 부리고 쓰는 역방향까지 한 구조입니다.
앞 권에서 중심 수행이었던 숨죽여봄을 최종 목표로 고정하지 않고, 생각모드에서 감각모드로 바뀌는 전환점으로 둡니다. 생각이 비면 억눌려 있던 감각이 살아나 호흡·자기 말소리·몸동작이 선명하게 감지되고, 마음이 몸을 통제하려던 힘을 내려놓고 정신에 몸을 맡기기 시작합니다.
정신이 몸의 주인이고 마음은 그 몸의 움직임을 비추는 역할이라는 구조를 이해하고 개념정리하는 것이 아는 공부입니다. 길들이는 공부는 경계를 만나도 마음이 몸을 직접 통제하려는 습관을 내려놓고, 정신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믿고 맡기며 생활 속에서 계속 알아차리는 데 익숙해지는 체득의 공부입니다.
마음이 몸을 늘보면서 먼저 보는 마음이 독립된 주체가 아님을 보고, 보이는 몸도 독립된 실체가 아님을 봅니다. 그 뒤 몸 안의 작은 하늘과 몸 밖의 큰 하늘이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텅 빈 무의 하늘과 가득한 유의 광명이 포개어진 대소유무의 하나가 절대무·정신·봄나입니다.
육안으로 외부의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동시에 심안·영안으로 자기 몸과 마음의 움직임도 보는 것입니다. 밖만 보면 보는 내가 대상 밖에 남아 주객이 갈리지만, 돌아봄이 동시에 작동하면 자기까지 포함된 현상을 보게 되어 자연과 나, 안과 밖, 본질과 현상이 한 장면 안에서 함께 드러납니다.
크고 작음,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 움직임과 고요, 생과 사, 성공과 실패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 다른 쪽을 배격하면 모가 납니다. 양극을 함께 보고 균형과 조화 속에서 상생하면 둥글어집니다. 다음 권 《둘이 하나가 된 둥근 사람》은 바로 이 ‘둥금’을 사람의 완성과 생활의 구조로 더 깊이 다룹니다.
원문에는 몸 늘봄·숨죽여봄·운기조식과 정신의 빛과 열기를 질병 치유, 체온 조절, 건강과 연결하는 강한 주장이 여러 글에 있습니다. LTOL에서는 이를 원문에 기록된 수행 체계의 주장으로 그대로 보존하되, 현대 의학에서 검증된 치료 효과나 안전한 호흡 지침과 같은 사실로 바꾸어 쓰지 않습니다.
164개 목차 항목 가운데 아래 열다섯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생활의 문제에서 시작해 오안, 자기 전체를 보는 눈, 생각과 감각, 사랑, 2→1→0과 0→1→2, 내면의 하늘과 명암일색, 정신·몸·마음의 역할, 아는 공부와 길들이는 공부, 봄나, 바라봄·돌아봄의 동시 작용, 마지막의 둥금까지 책의 실제 진행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현상·본질·마음의 지혜·논리적 표현·주객일체의 눈을 다섯 단계로 풀어, 이 책에서 ‘본다’는 말의 범위를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