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놓치지 않는 생활에서 시작해 《무문관》의 공안으로 생각의 끝을 밀어붙이고, 본격돌아봄과 숨죽여봄을 거쳐 정신의 바탕을 확인합니다. 후반에는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는 전제 자체를 뒤집어, 정신은 몸의 행위자이고 마음은 그 움직임을 보고 아는 주시자라는 본래 질서를 확인합니다.
《마음이 몸을 늘봄》은 교학을 더 쌓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고요할 때 숨죽여봄하고 움직일 때 몸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이 들어,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을 만큼 실행이 익어야 교학이 생활 수행이 됩니다.
아픔과 스트레스부터 몸으로 직접 확인합니다. 아픔을 피하거나 없애려고만 하지 않고 실제로 감각하며, 스트레스도 부정적인 반응을 억누르고 도피하면서 쌓인 것으로 보고 그 반응이 일어나는 전 과정을 봅니다. 몸과 마음의 문제를 생각만으로 해결하지 않고 실제 몸의 감각으로 확인합니다.
‘마음이 몸을 늘봄’은 정해진 자세와 시간에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앉아 있을 때 호흡을 느끼고, 말할 때 자기 말소리를 듣고, 움직일 때 눈·목·팔·허리·다리의 동작을 알아차리며 생활 전체에서 몸을 놓치지 않습니다.
처음 목표는 생각 제거가 아닙니다. 생각이 감각을 억누르고 몸을 끌고 다니는 생각모드에서 벗어나 감각이 주도권을 회복하고, 필요한 생각은 내고 필요 없는 생각은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을 부리고 쓰는 쪽으로 두뇌사용법이 바뀝니다.
감각과 생각도 적으로 남지 않습니다. 감각이 주도권을 되찾은 뒤에는 생각을 다시 살려 함께 씁니다. 몸의 실제를 감각하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시 감각하여 두 기능을 상생·합작으로 씁니다.
머리·가슴·아랫배도 한 운행 안에 들어옵니다. 두뇌가 비고 밝아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가슴에 정감과 열기가 살아나고, 하단전에 중심이 잡혀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때에 맞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는 《무문관》 공안이 한 축을 이룹니다. 조주 무자, 구지의 손가락, 달마의 수염, 향엄상수, 세존염화, 남전참묘, 평상시도, 마삼근, 구향용담, 비풍비번, 즉심즉불을 비롯한 공안이 잇달아 나오며 선불교의 화두를 몸돌아봄과 감각 공부 안에서 다시 읽습니다.
공안은 옛이야기의 정답을 맞히기 위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하나의 의문에 모아 일심으로 만들고, 생각으로는 더 갈 수 없는 끝까지 밀어붙여 무심과 감각이 열리게 하는 장치로 읽습니다.
「조주 무자」의 서언에서는 하나의 의문을 지속하여 일심을 만들고, 그 일심이 지속되어 무심인 정신을 깨닫는 직행법을 화두공안법이라고 합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문이 걸리는 것은 아니므로 한 가지 보편 수행법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옵션법과 화두공안법」에서는 둘의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화두는 의문 하나를 붙들어 무심을 열고, 옵션법은 ‘육체를 감각하겠다’는 한 생각을 지속하여 몸과 정신을 함께 놓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화두의 의문에 몰입하면서 육체를 놓칠 수 있는 한계를 짚고, 몸을 감각하는 옵션은 정신이 몸을 여의지 않게 하여 영육쌍전을 함께 세웁니다. 공안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도 몸과 정신을 함께 깨닫는 데 중심을 둡니다.
공안의 해석도 몸과 감각으로 돌아옵니다. 달마의 수염에서는 보이는 유와 보이지 않는 무를 함께 보고, 세존의 꽃과 가섭의 미소에서는 바깥 꽃의 뜻풀이보다 직접 보는 감각으로 돌아가며, 「평상시도」에서는 멀리 있는 특별한 도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작동하는 감각·순수의식·평상심을 확인합니다.
「마삼근」에서는 텅 빈 본체만 진리로 남기지 않습니다. 모양·소리·무게가 있는 현상까지 체와 용의 관계 안에 놓습니다. 공안 공부도 현상을 버리고 무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깨달은 뒤 다시 몸과 생활의 구체적인 현상으로 돌아옵니다.
공안군 뒤에서는 몸돌아봄과 마음돌아봄보다 더 안으로 모이는 본격돌아봄이 중심이 됩니다. 호흡이나 몸동작, 생각 같은 특정 대상을 붙드는 부분적인 집중이 아니라 목표와 대상 없이 안으로 모이는 구심력 자체가 발동합니다.
본격돌아봄이 살아나면 몸과 마음을 일일이 목표로 삼지 않아도 몸동작과 생각이 저절로 감지됩니다. 안으로 돌아보면서도 밖이 끊어지지 않아 안과 밖이 함께 밝아지는 내외명철이 열립니다.
정신의 바탕을 허공성·침묵성·청정성·광명성으로 밝힙니다. 생각에 덮이지 않은 무한 허공의 깨끗함과 밝음을 직접 보고, 한 번 본 기억으로 끝내지 않고 생활 가운데 놓치지 않는 견성과 늘봄을 익힙니다.
숨죽여봄도 여기서 중요한 방편이 됩니다. 직접 집중하기 어려울 때 집중하면 숨이 죽는 현상을 거꾸로 이용하여, 숨죽여봄으로 일심과 무심의 바탕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뒤에서는 숨을 억지로 붙잡는 방법에 매이지 않고, 들숨과 날숨이 나오기 전의 제로 바탕을 알면 방법 자체도 놓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권 《숨죽여봄》으로 이어지는 다리지만, 여기서도 목적은 몸과 정신을 갈라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생각이 몸을 억지로 끌고 다니는 유위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작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무위와 심신일여를 확인합니다.
후반에는 수행의 주체를 보는 자리가 크게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마음이 몸을 놓치지 않고 감각하며 몸을 잘 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아가 몸을 저절로 부리고 쓰는 동작을 감지하면서 살기」에서는 몸이 이미 무형한 정신에 의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확인합니다.
이때 소아인 마음의 역할도 달라집니다. 마음은 몸을 부리는 행위자가 아니라, 정신·대아가 몸을 부리고 쓰는 동작을 보고 알고 구경하는 주시자입니다. 몸은 움직이고 마음은 그 움직임을 감지하며, 행위와 주시가 함께 있을 때 정신이 드러납니다.
「무엇이 깨달음인가?」에서는 생각하는 소아를 진짜 나로 여기던 선입관이 깨집니다. 무심인 정신·대아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몸을 부리고 쓰는 주인이고, 소아는 일꾼이 아니라 그 작용을 보는 구경꾼입니다.
「에고는 전지전능에 끝까지 도전해보아야」에서는 이 반전을 더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성리를 알고 싶은 욕구도 다해보고, 자기 의지와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완벽히 통제하려는 수행도 끝까지 해봅니다.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음을 철저히 알고 나서야 이미 정신이 몸을 저절로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습니다.
따라서 수행은 통제력을 무한히 키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통제하려는 마음 자체가 몸의 행위자라고 자처했던 착각을 보고, 마음의 본연 역할이 주시자였음을 확인합니다.
「무슨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는가?」에서는 마지막 질서를 단정적으로 세웁니다. 정신은 몸의 행위자이고 마음은 몸의 주시자입니다. 마음이 행위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정신이 몸을 부리고 쓰는 동작을 동시에 보고 알 때 대아와 소아, 행위와 주시가 제자리를 찾습니다.
마지막에는 정신의 허공성·침묵성·청정성·광명성을 거듭 음미합니다. 머리는 텅 비고 가슴에는 사랑과 기쁨의 정감이 충만한 평상심이 생활에 자리잡을 때 증득이 됩니다.
《마음이 몸을 늘봄》은 몸을 놓치지 않는 감각에서 시작해 생각을 일심으로 모으고, 《무문관》의 공안과 화두를 통과하고, 본격돌아봄과 숨죽여봄으로 정신의 바탕을 확인합니다. 마지막에는 ‘내가 몸을 움직인다’는 마음의 착각까지 놓고 정신·몸·마음이 본래 역할을 되찾습니다.
이런 때 읽어보세요
‘마음이 몸을 늘봄’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공부인지 궁금할 때
몸을 감각하는 일이 왜 생각과 집중력의 문제로 이어지는지 알고 싶을 때
이 책에 《무문관》 공안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궁금할 때
조주의 ‘무’를 이 책은 어떻게 읽는지 알고 싶을 때
옵션법과 화두공안법을 어떻게 다르게 보는지 궁금할 때
평상심이 도라는 말을 이 책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고 싶을 때
몸돌아봄과 본격돌아봄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때
숨죽여봄이 왜 이 책의 후반에 등장하는지 알고 싶을 때
대아와 소아, 정신과 마음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싶을 때
왜 마지막에는 몸과 마음을 통제하려는 노력까지 내려놓는지 궁금할 때
질문으로 읽기
이 책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몸을 늘봄》은 어떤 책인가요?
생활 속에서 자기 몸을 놓치지 않고 감각하는 공부로 시작해 생각과 감각의 주종관계를 바꾸고, 《무문관》의 공안과 화두공안법을 거쳐 본격돌아봄·숨죽여봄으로 정신의 바탕을 확인합니다. 마지막에는 정신이 몸의 행위자이고 마음은 그 움직임을 비추는 주시자라는 질서를 밝힙니다.
아픔이나 괴로운 반응을 무조건 없애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실제로 감각하여 끝까지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스트레스는 경험되지 못한 반응이 억압·회피되어 쌓인 것이고, 아픔도 좋고 나쁨으로만 가르지 않고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치유에 관한 강한 표현은 원아 유종열님의 주장입니다.
공안을 별도의 선불교 지식으로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감각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조주 무자」의 서언에서 화두공안법은 흩어진 생각을 하나의 의문으로 모아 일심을 만들고, 그 일심을 지속하여 무심인 정신을 깨닫는 방법입니다. 이어 여러 공안이 감각 공부와 연결됩니다.
둘 다 한 생각을 지속하여 일심이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화두공안법은 하나의 의문을 지속하여 무심인 정신을 깨닫는 길이고, 옵션법은 ‘육체를 감각하겠다’는 일심으로 몸을 감각하면서 정신도 함께 깨닫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옵션법을 몸과 정신을 함께 깨닫는 영육쌍전법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몸돌아봄은 호흡이나 몸동작을, 마음돌아봄은 생각을 대상으로 삼아 알아차리는 부분적인 집중입니다. 본격돌아봄은 특정한 목표나 대상을 두지 않고 안으로 모이는 구심력 자체가 발동하는 집중입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따로 붙잡지 않아도 저절로 감지되고 안과 밖도 함께 밝아집니다.
그전까지 길러온 집중력과 수행을 단순히 더 강한 자기통제의 완성으로 끝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의지로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끝까지 노력해본 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철저히 알아야, 이미 무형한 정신이 힘들이지 않고 몸을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초반에는 감각이 생각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하여 생각을 필요할 때 내고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후반에는 정신이 몸을 움직이고 마음이 그 움직임을 주시하는 동시 작용이 드러납니다.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몸·마음이 각자의 역할로 함께 작동하는 것이 결론입니다.
133개 목차 항목 가운데 아래 열한 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몸을 놓치지 않는 수행의 출발, 감각계발, 《무문관》 공안의 도입, 옵션법과 화두공안법의 차이, 평상심, 본격돌아봄, 숨죽여봄, 대아와 소아의 역할 전환, 마지막의 가장 큰 반전까지 책의 실제 진행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서문] 책을 읽고 강의 듣는 목적
읽고 이해하는 교학이 몸을 놓치지 않는 늘봄 수행으로 넘어가야 하는 기준을 분명히 봅니다.